퇴근 길
피로가 몰려 와 반쯤 감긴 눈에 윤곽만 남은 립스틱...
빗물에 퇴색된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희미하다.
이곳이 타인에게 관심 없는 외국인 것에 감사하며
엘베 앞에 섰다.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옆에 나란히 섰다.
이 나라에선 뒤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상식인데
이 남자, 옆으로 나란히 서서 기다리는 게 의외다.
좀 ...
딱히 설명 할 말은 없지만 ....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매력적인 것도 아닌
그러나 못 생긴 것도 아닌...
남자와
늦은 저녁시간 엘베 앞에서 나란히 서 있기가
조금은 거북스럽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한...
그렇다고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거나
곁눈질로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하기만 할 뿐인데
괜히 쭈볏쭈볏 눈치를 보게 하는
약간의 두려움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것이
야릇하다.
엘베가 멈췄다.
나의 왼발, 남자의 왼발
나의 오른발, 남자의 오른 발
나란히 올라 탔다.
남자는 6을
나는 4를
눌렀다.
옷깃 스치지 않도록 어깨를 움츠리며
숨소리조차 죽이며 섰다가
4층에서 멈춰 선 엘베에서 내가 내렸다.
그 남자도 내렸다
\'6층이라면서 왜 내렸지?\'
남자가 내 뒤를 계속 따라 온다
\'흠.. 동양인이 작아서 아줌마라는 걸 모르고 혹시??\'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복도
겁이 덜컥 난다.
간간이 불이 나간 전구는 약간 어둡기까지...
남자는 계속 따라오고
아파트 복도가 오늘따라 좁고 길게만 느껴진다.
\'아.. 어떻게 하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만약
말을 걸 경우...
이상한 제스처를 할 경우....
내 앞을 막으며 \'I LOVE YOU\'라고 할 경우....
나의 행동요령을 그려보며
부지런히 걸었다
남자도 부지런히 뒤를 따라 온다.
30초 40초....
길기도 하다
후우 ~ 비장한 마음으로 한숨을 토하는 뒤로
\'으~~\'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본능적으로 \'휙\' 뒤 돌아 본 복도에는
엘베쪽으로 다시 뛰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남자가 하하 소리내며 웃더니
엘베 앞에서 멈춰 선다.
6층 눌러놓고
4층에 내리는 나를 따라 잘못 내렸던 것.
ㅋㅋㅋ
남자는 엘베 앞에서 큭큭대며 웃고
나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큭큭대며 웃었다
다시 올라가는 엘베를 기다리며 웃어대는 남자의 웃음소리와
3분 이상이몽(異想異夢)에 젖었던 여자, 나의 웃음소리가
긴 복도에 공명을 내며 울렸다.
착각은 자유
오해는 공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