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하나 주세요.\"
장미, 이름만으로 화려한 수식어가 되는 꽃
장미를 내놓으라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꽃가게인줄 알겠지만 봉자네도
장미, 있습니다.
어디 장미뿐이겠습니까.
라일락도 있구요.....얼마 전까지는 보라색 별꽃 도라지도 팔았답니다.
엄동설한에 구멍가게에서 피는 꽃, 아니 파는 꽃......
얼추 짐작하셨겠지요? 이것들은 모두 담배 이름입니다.
지난 폭설이 내렸을 때 환자복을 입고 들어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쌀쌀한 날씨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인의 얼굴은
하관에 살점이 적고 길게 빠진 턱 때문인지
중학교 미술책에 나왔던
모딜리아니 그림 속 목이 긴 여인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뼈와 추위에 노출된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그 모습이 중학생 눈에 비친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장미 하나만 주세요.\"
여인은 며칠 째 담배를 사러옵니다.
여인이 입은 환자복에는 산 아래 외과전문 병원 이름이 새겨져있었습니다.
소주나 담배를 꽤나 사가던 속칭 나이롱 환자들이 더러 머물던 병원인데
그곳에서 내려왔다면 눈이 가득 쌓인 거리를 한참 걸어와야 했을 겁니다.
영하 십도를 훨씬 넘기던 날씨에 목도리는 커녕 봄에나 입을듯한 얇은 잠바
하나만 덧 입고 걸어왔으니 보통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차림이었습니다.
금색 장미가 그려진 담배갑을 건네다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 지 얼마동안 지낼 건지
몇 마디 물을까도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무표정한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매번 망설여졌습니다.
제대로 말을 붙여보지 못하고 담배만 건네던
어느 날에는 여인이 먼저 두 번째 말문을 열었습니다.
\" 봉지 하나만 주세요...봉지값은 여기....\"
봉자는 즉시 손사레를 치며
\"그냥 드릴게요. \"
이 정도 쯤이야 하는 얼굴로 활짝 웃어보였지만,
표정이 바뀌지 않는 담담한 얼굴로
\"아뇨, 받으세요....받으세요.\"
돈을 받지 않으면 비닐봉지는 가져가지 않을 태세였습니다.
생각해보니 봉자네 가게를 연 이래
누구도 봉지값을 먼저 내미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비닐봉지는 구멍가게의 계륵입니다.
안면이 빤한 동네장사 하면서 부러 봉지값을 받을 수도 없고
안 받자니 봉파라치의 신고가 두려운 처지입니다.
만약 누군가 봉지값을 받지 않는 장면을 찍어 시청에 신고라도 하면
꼼짝없이 수십만 원을 물어야합니다.
구멍가게 장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벌금이지요.
해서, 낯선이가 가방을 둘러매고 들어와
빵이나 우유 하나 달랑 사면서 굳이 봉지에 넣어 달라할 때는
바짝 긴장하여 어깨에 맨 가방에 카메라를 숨기지 않았나 유심히 살피곤 합니다.
복 없게 생겨 먹은 데다 철에 맞지 않은 복장을 하고,
나이롱 환자로 의심 받는......
타르 7mg나 되는 독한 담배를 피우는 여인이
선의의 제도를 사익으로 남용하는 사람과
좋은 게 좋다는 봉자의 상술 사이에서
산뜻한 반전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모딜리아니 그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몰랐던 중학생 봉자나
외모로 사람을 분별하는 나이든 봉자나 부끄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는데 이제 그 여인은 오지 않습니다.
환자복 위에 둘렀던 복대를 떼어 내고 말끔히 나아 퇴원했나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가게에 홀로 앉아 중얼거립니다.
모딜리아니가 사랑한 여인 잔느 에뷔테른 같은
아름다운 장미의 여인이여....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