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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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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불편한 환상


BY 봉자 2010-01-13

옛날,

그러니까 봉자 여덟 살이 다 차고 해(年)가 교차하던 겨울, 고향집에 함박눈이 내렸다.

지극한 남녘......그곳에서 눈을,

고양이 오줌발 같은 눈 말고 발자국을 찍을 만큼 쌓인 눈을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담벼락 밑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기왓장 조각, 나뭇가지, 돌멩이.....이런 시시껄렁한 것들이 흰눈으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 같았던 그날은

문틈 사이로 잉크빛 새벽과 경계를 이룬 순백의 설국이 잠이 덜 깬 봉자를 하염없이 불러내고 있었다.

문풍지가 너덜거리는 방문을 밀고, 댓돌 위 신발을 꿰 신고 겨우내 묵은 텃밭을 지나고 나니,

마른 갈대가 눈에 뒤덮인 거대한 저수지에 이르게 되었다.

두꺼운 얼음장으로 덮힌 저수지, 그 위를 뒤덮은 드넓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남길 때

봉자는 보았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저 멀리 푸르른 청마를 타고 오는 왕자님을......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일어나?

현실이 아닐 수도 있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 어린 봉자는

눈 속에 파묻힌 발끝을 한 쪽 발로 꾹 눌렀다.

아프다.....

그렇다면 저 왕자님은 누굴까.

동화 속에서 뛰쳐나왔다고 생각하기엔 봉자 머리통이 야물어졌고, 

푸르스름한 설원은 너무나도 꿈결같았지만 미확인자 \'그\'는

최대한 현실적인 인물로 소망해 놓아야 한다.

읍내 사는 우리반 반장?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여멀건 그 아이, 나 혼자만 좋아한 게 아닌지도 몰라.

자식, 나를 좋아하고 있었어!

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만 보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마음이라면

온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지금 이뤄져야 해!

어린 봉자가 눈을 감고 몽환 속에 젖어 있노라니

어디서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 찌링 찌링 찌리링~\"

\"가스나야. 이 새벽에 내복 바람에 머하고 있노. 감기 들겄다 퍼뜩 들어가래이!\"

크흑흑....푸른 갈기 휘날리는 청마 탄 님, 그 새벽의 환상은

자전거 양 쪽에 죽통을 매달고 집집이 돼지죽 걷어러 다니는 뒷집 키다리 노총각이었다.

 

어른이 되어도 눈이 오면 설렌다.

별다른 추억거리 없이 청춘을 보낸 밋밋한 삶이지만

오래 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눈 덮힌 시베리아 벌판의 라라의 테마(닥터 지바고)와

젊은 아줌마의 감동으로 생생한, 히로코의 \'오겡끼 데스까\' 눈 덮힌 고베의 산...러브레터,

그리고.........눈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한다는 \"러브 엑츄얼리\"

심장이 팔딱이는 한 잊지 못할 영상들이 연속적으로 떠오른다. 눈이 오면....

 

며칠 전에도 눈이 흠씬 내렸다. 지금 사는 곳에서는 흔히 보는 눈이다.

한 번 내리면 잘 녹지 않는 이 거리에서, 봉자 몫은 집에서 가게 까지 오백여미터,

그 짧은 거리에서 눈에 대한 낭만을 깨부수는 건 예상외로 많다.

새하얀 눈길 위에는 취객의 오줌발로 생긴 노란 구멍과 

쌀 때의 형태 보다 더 오롯한 개똥, 한 모금 남은 흔적이 지저분한 먹다 버린 커피 캔 따위,

이런 것들을 비켜가며 발 끝에 힘을 주고 걷노라면 발목이 시큰하고 장단지가 뻐근해진다.

갓길이 좁은 탓에 검은 눈덩이가 자동차 바퀴에 쓸려 옷에 튈까 신경이 쓰이고.....

길 건너 언덕배기 소나무 사이로 날아드는 까치 두 마리를 보면서

산정에 배곯는 뭇 짐승들을 위해 얼음을 깨 놓거나, 곡식을 뿌려주는 노스님을 떠올린다.

봉자는 행하지도 않을 일에 몹쓸 걱정만 수백가지다.

 

폭설이 내리자 정부에선 제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이 100만원란다.

꼬부랑 노인들만 사는 집 앞도, 맞벌이 집도 눈만 오면 염화칼슘 뿌려가며 밤을 새야 한다.

백만 원...뉘집 개이름도 아니고 우리가 낸 세금은 다 어디다 쓰는 지...

천재지변도 이젠 각자 알아서 대처하란  뉴스를 듣자니 화가 치민다.

어디다 누구한테 댓거리라도 해야할텐데,

봉자는 어느 새 빗자루를 움켜쥐고 가게 앞 보도 블럭이 선명하게 눈을 쓸고 있다.

허리도 아프고 손아귀에 마비가 오려한다.

어쩌냐....100만원이란다. 눈도 자꾸 오면 웬쑤가 됨을.

아직 통과 될 지 여부도 불분명한 법령 앞에 간이 콩알만해지는

이 죽일놈의 소시민적 근성에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눈에 대한 환상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