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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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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일지(흔들리며...)


BY 새봄 2010-01-11

 

몇 달에 한두 번 병원을 벗어나 멀고도 가까운 친구를 만나러가는 길은 내겐 유일한 이탈이다. 그때마다 출발지에서 작은 책을 한 권 사는데, 몇 달 만에 사기 때문에 저번엔 10월호였는데 이번엔 해가 바뀐 2월호였다. 책표지는 노란 수선화가 핀 봄이 오고 있었다. 겨울의 한가운데 있으면 꽃피는 봄이 없었던 것 같다가도 시간은 머물지 않고 움직여 반드시 봄은 오게 되어 있다.

 

전철 안엔 내가 앉을 공간이 있고, 마주보고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잠시나마 이 공간속에 함께 머물게 된다. 밖의 풍경을 볼 수 없는 공간이라 젊은이들은 손바닥만한 디엠비를 보거나 게임에 몰입되어 있다. 나는 다리위에 가방을 얹어놓고 그 위에 책을 올렸다. 책은 전철이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다가 조금씩 미끄러진다. 가방을 눌러 책이 잘 올라가게 모양을 잡았지만 이내 미끄러졌다. 안되겠다 싶어 책을 반으로 접어 두 손으로 꼭 잡고 보았다.

 

사는 동안 많이 흔들리며 살아왔다. 며칠 밤을 뒤척였고 그러다가는 될 대로 되겠지, 하며 흔들리던 마음을 두 손으로 꼭 잡고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내가 잡으려 해도 그것은 잡히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네가 될 수도, 그대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없었다. 나는 나일뿐. 나만의 길로 접어들어야만 했고, 그 길에서 홀로 울부짖어도 나는 나일뿐이었다.

 

몇 번의 정거장을 지나면서 내리는 사람보다는 타는 사람들이 많아져 내 앞엔 낯모르는 사람들이 서 있게 된다. 그들은 멍하니 창밖으로 눈을 고정하고 있다. 창밖은 터널처럼 어둡다. 그 어둠속을 가르며 하모니카 소리가 들린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걸어오신다. 그 바구니엔 천 원짜리 지폐가 구겨져 들어 있다. 나도 천원을 꺼내 바구니에 얼른 넣으며 간절한 기도 하나 같이 넣었다.

“고독도 내 것이려니 간직할 수 있고, 외로움도 익숙해져 괜찮아졌습니다. 다만 수술을 앞둔 사람 하나 내 곁에 있으니 부디 보살펴 주소서…….”

 

3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는 연결통로 가게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말린 생선처럼 걸어진 수면바지가 오천 원이라고 써있었다. 매일 밤마다 아! 추워하던 딸을 위해서 포실포실한 수면바지를 하나 샀다. 바지를 말아서 가방에 넣었더니 가방이 동그랗게 말은 수면바지를 닮게 되었다.

 

1호선은 지하 숲을 벗어나 지상으로 달리게 된다. 작은 책속에는 어둠을 힘차게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소한 감동을 주는 내용들로 엮어져 있다. 짧지만 그 속에는 길고 깊은 일상이 읽은 사람들 가슴을 애잔하게 녹여준다.

[나의 마지막 시간은 언제인가? 오늘이 나의 마지막 시간 중 첫날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마지막 시간인 셈이다. 나는 지금 마지막 시간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스스로 자문해 본다. 나의 미래를 생각하면 흔들려 어지럽다. 그러나 오늘이 있어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죽음까지 갔다 온 환자들이 마취에서 깨어나거나 병마에서 벗어날 때의 그 환희와 희망을 나는 겪지 않아 모르지만, 인생의 막바지에 서있던 너를 보았을 때나, 준비 없던 이별을 그대가 먼저 준비하고 있을 때나, 내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뛰어가는 당신을 보았을 때나……. 그리고 일 년쯤 세월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너와 그대와 당신에게 느끼는 열정으로 가득한 꿈과 비슷하지 않을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일이 아직 안 끝나서 한 시간쯤 늦어질 것 같으니 역 근처 찻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역 근처는 수많은 사람들 발자국이 찍혀 있다. 큰길에도 골목길에도 발자국들이 어질러져 뭉개져 있었다.

둥근 나무 탁자가 세 개 놓인 빵집겸 찻집의 문을 여니 아르바이트생이 젊음만큼 낭랑하게 인사를 한다. 구석진 자리엔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자 두 분이 마주 앉아 한창 대화중이다. 나는 가운데 탁자에 앉아 탁자 닮은 동그란 빵과 아메리카노 커피를 시켰다. 다시 책을 펼쳤다.

 

내가 어디서나 책을 선물처럼 펼치는 이유는 상처받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람들은 돈 이야기나, 자식 이야기나, 남편이야기나, 쇼핑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과 같이 그런 이야기 속에 내가 차지할 부분도, 내가 끼어들 부분도 별로 없었다. 책을 펼치면 그 속에는 많은 사건과 사연이 섞여 있다. 내가 차지할 것도 없는, 내가 끼어들 필요도 없는, 책은 책이고 나는 나로 남아도 불편하거나 상처받지 않게 된다.

 

좁은 찻집안의 커피향이 맵지 않은 연기 같다. 아침 출근길 안개처럼 촉촉하기도 하다.

 

한 시간 늦는다는 친구가 30분 안에 도착한다고 역전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반쯤 남은 반달모양빵을 봉지에 담아 수면바지 옆에 끼워 넣었다. 가방은 바람 잔뜩 넣은 풍선처럼 빵빵해졌다.

 

밖엔 포실포실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 발자국으로 얼룩진 길위에 눈 발자국이 얇게 덮여 있다. 노란 수선화가 그려진 책을 끼고 친구가 오는 겨울 속으로 마중을 간다.

 

내가 아무리 흔들려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그대가 되지도 못하고, 당신이 나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두 손으로 나를 지탱하며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