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witnessing
우리의 본질인 ‘사랑(생명)’을 찾아가는 과정은 쉽게 말하면 수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수양의 과정에는 과연 어떤 방법이 있는가?”
물론 있습니다. 이 방법은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써왔던 것인데, 바로 <관조>와 <이해>와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마치 연극을 보듯이 지켜보면서 이해하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나기’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이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관조하고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만으로 수양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장담하건대, 분명히 수양이 됩니다. 쉽게 설명해 봅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고 하고, 그리고 그 목욕하는 사람을 ‘나’라고 합시다.
그 목욕탕 출입문에는 조그만 구멍이 나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목욕탕 안에서 목욕을 자유롭게 여러 가지 움직임을 보이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출입문 구멍을 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 그의 행동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라는 것도 밖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고 멋대로 놔두니까 제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라는 것은 제멋대로 놔두면 이 세상에 전쟁과 투쟁과 갈등과 질투, 오해, 억압 등의 부조화만 불러일으킵니다.
때문에 우리는 ‘생명(사랑과 조화와 자유)’의 삶을 위해 ‘나’를 어떻게든 통제하여 우리의 본질인 생명의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나’라는 경험의 세계를 사용하여 이 세상에 사랑과 조화와 자유의 삶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