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발견 self-discovery
사실 ‘사랑(생명)’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나(에고)’를 우리의 본질로 착각하고 살아왔고, 또 ‘나’가 우리 마음속에 너무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습관화되어 있어서 그것을 뿌리째 뽑아 버린다는 것은 거의 자신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사 자신이 ‘사랑(생명)’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나’의 구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우리의 원래의 생명의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연어가 자신이 떠나온 모천母川을 찾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사랑과 조화의 근원인 생명의 고향을 향하여 ‘나(에고)’를 거슬러 오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속의 ‘나’는 애초에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서 흘러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그 ‘나’를 무너뜨리는 일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흘러 내려온 그 반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제거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차이점이라면, ‘나’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는 ‘나(에고)’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피상적인 것밖에 없습니다.
“나는 매우 가난해.”
“나는 성격이 좀 우유부단한 것 같아.”
“나는 겁이 너무 많아.”
기껏해야 이런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또 매우 복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것들도 많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내기란 깊은 바다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난 남자만 보면 전부 다 속물로 보여.”
그 이유는 남들은 물론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거나, 무의식 깊은 곳에 들어가 보면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조차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됩니다. 그것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하나의 장애가 됩니다.
때문에 그 원인을 자각하여 그런 생각을 태워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자유와 조화의 삶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를 속속들이 알아내어 의식 밖으로 드러내 놓을 수 있을까요? 일단 그게 돼야 관조와 이해와 인내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 좋은 방법이 있는가?”
물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 속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경쟁이 치열한 이 세상 속에서 말입니다.
부딪힘이 없으면 우리는 ‘나’를 알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이모의 아들이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친한 친구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전부 다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어쩌다가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술을 마시면서 온통 대학에 관계된 얘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동아리 얘기에다 미팅 얘기에다, 자기는 시간표를 잘 짜서 4일만 나가면 된다느니 하면서.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모의 아들은 계속 애꿎은 술만 퍼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술병을 바닥에 내리치면서 외쳤습니다.
“야, 이 자식들아! 대학 얘기 좀 그만 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대학에 떨어졌다는 것이 하나의 콤플렉스가 되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친하게 잘 지냈던 친구들이었는데 왜 올해는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그의 마음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 ‘나’의 구성 요소로 자리 잡아서 그것이 그를 구속하여 장애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새로운 ‘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는 수많은 부딪힘이 존재합니다. 그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나(에고)’의 꼴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본질은 생명 에너지 그 자체라서 빈 허공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라는 구름이 떠다니면서 외부의 상황과 부딪치면서 ‘기분 나쁨’이라든가 ‘고통’이라는 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란, 가을날의 맑은 하늘과 같아서 평상시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고요하고 평화롭다가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혹은 대상과 부딪치면서 혼란해지거나 괴로워집니다. ‘나’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욕을 했다고 합시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한국말을 알기 때문에 그 욕을 듣자마자 마음속에서 즉시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즉시 기분이 나빠지면서 감정이 일어납니다(만약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이라면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언어에 얽매여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욕을 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발견도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무인도에 들어가서 혼자 살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꼴이 어떤 형태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빨리 발견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관계 속에 놓여 봐야 합니다. 그것이 자아 발견의 지름길입니다.
‘나(에고)’는 전기의 저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본질인 생명 에너지는 자유, 사랑, 그리고 조화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아무런 장애나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로 흐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경험의 세계가 우리 마음속에 고착되어 ‘나’라는 것이 뿌리내리게 되면서부터 우리 마음속에는 ‘나’로 인한 저항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겪는 마음의 고통이요 괴로움입니다.
전기도 저항이 없을 때는 막힘없이 잘 흐릅니다. 전기가 흐른다는 것조차 잘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저항이 생기면서 흐름이 느려지거나 막히거나 불꽃이 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바로 그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자유롭고 평화로운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어디에서 고통과 불행을 볼 수 있나요? 그들은 단지 먹을 것만 해결되면 마냥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먹을 게 해결되고, 많은 것을 가질지라도 그들처럼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빨리 우리 마음속에서 ‘나’로 인해 벌어지는 저항과 장애(고통과 괴로움)를 하루빨리 발견하여 그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본질인 ‘생명(사랑)’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흙을 벗겨내면 숨어 있던 보석이 그 빛을 저절로 드러내듯이.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