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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거 별거 아녀~! (2부 10회) 잘 살아보세


BY 만석 2009-09-25

 

2부 제10회


잘 살아보세


  나는 시방 왕년의 인기가수 나애심씨를 생각한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 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에 참빗질을 한 것 같이 빤빤하게 빗어 넘긴 칠흙 같은 검은 머리. 몸에 붙는 하얀 롱 드레스를 즐겨 입던 우아하고 지성적인 모습의 그녀. 아무리 넓은 스테이지라도 그녀의 허스키한 목청과 그레머틱한 몸매가 그 스테이지를 압도하곤 했다. 그녀의 히트곡으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와 <백치 아다다>가 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가수 김혜림의 모친(母親)이라고 일러주는 게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되겠다.


  뭘 좀 아는 척 하려고 인터넷을 뒤졌더니 헛고생만 하고 말았다. 그녀를 일러 ‘한국의 안나 카시피’라고들 했으니, 안나 카시피에 대해서 아는 채를 좀 하고 싶었다는 말씀이야. 그런데 뒤지는 사이트마다 ‘한국의 안나 카시피 나애심’이라고만 떠들어대니……. 안나 카시피가 팔등신의 영화배우인지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인지는 몰라도, 아마 우아하고 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을 게 틀림없을 게다. 아무튼 시방, 그가 누구를 닮았는가를 얘기하자는 건 아니다. 그녀가 가고 없는 지금, 왜 내가 나애심씨를 그 우아하고 멋진 모습으로 기억하는가를 말하려는 참이다.


  가수 김혜림을 초대한 모 방송국에서 나애심씨와 동참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애심씨는 완강하게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을 위해서 원정(遠征) 출연도 하는 모정(母情)이 얼마나 흔한데 말씀이야. 물론 그녀의 심중에 딸의 홀로서기를 자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는 딸이 엄마의 배경을 믿고 의타심을 갖게 되거나 나약해질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녀의 변(辯)을 알고는 내 좁은 시야(視野)를 나무랐다.

  “나를 사랑하는 팬들이 젊은 날의 나로 영원히 기억해 줄 것을 원한다.”는 게 그녀의 변(辯)이다. 가수 김혜림이 ’8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했을 때, 나애심씨의 나이는 60세를 향해 달렸지 싶다. 연예인의 나이 60세 전(前)이면 아직 화장발이 제법은 받을 만한 나이였는데 말이다.


  그녀는 또 같은 시대의 동료이자 라이벌인 여가수가 오랜 미국 생활 중에 귀국을 해서, 모처럼의 스테이지를 밟았을 때에 그녀를 무척 나무랐다고 한다. 그녀의 늙어 망가진(?) 모습에 팬들이 얼마나 실망을 했겠느냐고. 그 스테이지만 아니었으면 만인에게 젊고 예쁜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라는 게 나애심씨의 변이다. 그녀도 예쁜 목소리만큼이나 한 몸매 하던 여인이었으니까. 사실 내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후자의 연예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매와 제일 노래를 잘 부르는 여가수’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 아버지가 13년의 일본 유학을 하신 인테리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아버지의 그 극찬이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다.


  사람이 아니, 인간이 명(命)을 다하고 세상을 버렸을 때에, 어떤 말을 듣는가 하는 건 참 중요한 단서(端緖)다.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하는 진실(眞實)한 단서가 된다는 말이겠다.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망자(亡者)를 생전보다 격하(格下)해서 말하는 예는 거의 드물다. 혹 망자가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그는 잘 못 된 삶을 산 사람이다. 왜냐 하면, 당사자(當事者)가 없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과장(過狀)되게 말하는 법이니까. 혹여 지독하게 고생을 한 삶이라든가 가난에 찌든 삶을 이야기 할 때에도 그 정도(程度)는 과장되기 마련이어서 ‘혹독한 고생’이나 ‘찌저지는 가난’으로 표현하게 되어있다.


  이 밤. 눈을 감지 않아도 앞은 캄캄하다.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기보다는 ‘내 삶’을 돌아보자. 내가 이렇게 캄캄한 세상에 갇혀 있을 때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삶’을 어떻게 말할까. 우선은 생긴 외모를 말하겠지만, 그야 내 죄가 아니니 어쩌겠는가.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대로 그저 지니고 살 수 밖에 없었다고 치자. 백 년도 안 되는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가는 확실하게 문제가 되겠다. 욕심이 많다든가 없다든가, 재주가 많다든가 적다든가, 선 했다 거나 악질이었다거나……. 확실한 건 또 있다. 지금 나이 칠십을 향하자니 많이도 늙어 있다. 눈썹 사이의 쌍심지가 그렇고, 높지도 않은 콧대를 타고 흐르는 팔자주름이 그렇다. 또 성형을 했느냐고 묻던 굵은 쌍커풀이, 내려 미는 눈두덩이에 밀려서 속으로 숨어버린 몰골이 그렇다. 그러나 외모가 아니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건 나보다 타인이 말하는 게 옳고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나애심씨는 늘 나와 먼 사이에 있었으니, 나는 그녀를 말할 때 외모만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삶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니 늙어버린 몰골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누가 뭐라든 감수하자. 그렇다면 뭐는 감수하지 않을 방법이 있간디? 이미 세상을 버린 뒤에 남은 사람들이 내 삶에 대해서 감수하지 못할 만큼 격하한다고 치자. 반박도 할 수 없으니 그냥 들어 두는 수밖에. 그러자니 얼마나 속이 터질꼬. 그러게 속 터지는 일 없으려면 확실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말씀이야. 아예 내 속 터지는 말은 입에도 담지 못할 정도로, ‘정확하게, 바르게 잘 살자’는 말이지. 하하하.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으면, ‘꼴에……. 제가 살아온 삶은 모르고.’하겠다. ‘철들자 망령이 난다’는 말이 있지? 그런데 나는 시방, ‘망령이 나고 철이 들었다.’고 해야겠다. 큰 병을 얻고 나서야 생각하는 게 모처럼이나마 가상하니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잘 살고 싶은데 좀 봐 주소 케케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