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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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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셋에 불러보는 사모곡


BY 질마재신화 2009-09-15

대부분 사람들은 가슴에 깊은 사연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으면서 가끔은 라디오 속 슬픈 사연과 음악에 빠져 눈물을 훔치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어머니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이 흘러나올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흐르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엔 꼭 갓길에 비상등을 켜고 차를 정지한 채 어머니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내 어머니, 어머니의 삶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오랜 병투병 끝에 운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그 때 나이 어머니는 32살, 한 순간에 1남 1녀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만을 믿고 농촌에 시집 온 지 불과 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머니에게 있어 고생은 힘듦이 아닌 어쩔 수 없이 즐겨야만 하는 운명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남겨진 땅도 밭도 없는 상태에서 세 식구의 끼니를 걱정하는 일과 제대로 허리 한 번 펴볼 수 없었던 노동의 날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었다는 어머니의 말과 이모들이 하는 말을 조금만 들어도 그 힘듦의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 계절은 무의미 한 것이었습니다. 1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 없이 10평 남짓한 텃밭에서 일군 나물과 채소를 머리에 이고 10km가 넘는 읍내로 가 팔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팔아도 고작 7~8천원 정도였지만, 그것은 세 식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돈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날 팔았던 돈 중에 일부를 동생과 제가 등하교할 수 있는 교통비로 주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10km가 넘는 길을 행상으로 매일 걸어 다니면서도 정작 동생과 저는 걷지 않게 하셨습니다.

4년제 대학을 포기하고 전문대에 입학하려 할 때에도 어머니는 티끌처럼 모아놓은 돈을 선뜻 건네며 대학입학금으로 주셨습니다. 입학금을 건낼 때 어머니의 손은 40대 중반 여인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이마엔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양손에 굵게 배여있는 주름, 눈물이 흐르는 걸 애써 참았습니다. 대학진학이 어머니에겐 꿈이자, 삶의 전부였습니다. 남들처럼 배부르게 키우지는 못했지만 남들처럼 공부 시키는 것이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을 때에도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해병대를 지원했을 때 어머니는 ‘제가 너무도 미웠지만 한 편으론 너무 대견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남들은 어떻게든 군대에 안 가려 수단방법을 안가리는데 자식이 그 힘든 곳을 자원입대에 간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 흡족했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해병대에 있을 때 매월 2~3번씩 낙하산을 탔습니다. 한 번 뛸 때마다 생명수당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당이 나오면 군사우편 속에 넣어 어머니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 드실 수 있으면 그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으니까요.

이병 때부터 병장 그리고 제대를 한 후 저는 어머니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대학을 복학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날, 어머니는 제게 통장 하나를 주셨습니다. 통장에는 적지 않은 돈이 예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자식이 목숨 걸고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한다냐?”며 군대에 있을 때 보내드린 월급과 낙하수당을 제 이름 그대로 예금해 놓으셨습니다.

 

20년 가까이 행상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다리와 위장 등이 안 좋으셔서 매일 약을 드십니다. 시골에 내려가 한 번씩 보는 약봉지에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왜 그토록 몸이 나빠지셨는지,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가끔 어머니는 웃으면서 ‘괜찮다, 아직도 이렇게 수족이 멀쩡한데 머 헌다고 앉아서 쉰다냐? 내 나이가 얼마나 됐다고!’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지금은 그 누구의 뒷바라지도 없건만 어머니는 손에서 일을 놓치 않으십니다. 시골에 내려가면 아직도 차비와 점심값을 주시는 어머니, 돈이 없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받아야만 마음이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그 높은 사랑에 단, 한 번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늘 받기만 했던 어머니의 그 위대한 사랑, 세상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 노래방에 가는 날엔 799번 노래를 부릅니다. 가수 태진아의 사모곡이라는 곡인데 그 노래를 부를 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때론 목이 메이고 노래방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지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

추억은 오래 될수록 아름답다하지만 평생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좋은 곳 여행한 번 못하고 살아오신 어머니, 이제는 옛날보다 나아진 생활로 좀 더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동안 효도하고 고기 먹을 때 마다 떠오르던 아버지의 얼굴, 다시는 그 힘든 생활을 어머니께 전가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결혼할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 어머니께만 잘 한다면 제가 가진 모든 사랑을 드리겠습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 또한 없었을테니... 어머니께만 잘 한다면 그 이상 바라지도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