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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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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 후 엄마를 알았습니다


BY 문미정 2009-09-15


2005년 9월 중순경 첫아이 출산을 앞두고 친정에 머무르고 있을 때 출산 예정일은 아직도 보름이 넘게 남았는데 참을 수 없는 산통이 찾아왔습니다. 신랑은 지방 출장이라 곁에 없고 그나마 절 간호하던 엄마마저 내장산 단풍 구경을 간 뒤였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산통을 이겨내려 이를 악물었지만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하는 와중에 두려움만 배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심해지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엄마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저는 병원에 와 있었습니다. ‘정신이 드니?’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한다’라는 소리가 들리고 그 끝엔 아빠가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정보다 이른 출산과 함께 신음하고 있는 저를, 제 손을 꼬옥 잡아주며 낮은 음성으로 마음에 평안을 찾게 해 주시던 분. 하나님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눈물 흘리며 고통을 함께 나누시던 분. 이 세상에 정말, 하나뿐인 내 엄마가 서 계셨습니다. 임신 초기 때부터 유독 입덧이 심했던 저는 성격 또한 무척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예민해진 성격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 엄마는 싫은 소리 하나없이 묵묵히 받아주기만 하셨습니다. 하물며 싫은 소리하는 가운데 먹고 싶은 것을 말해도 멀다하지 않고, 신랑 몰래 강원도 속초까지 가 원조 실향민이 만든 가자미식해와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과일, 임금님께만 진상했다던 영광 굴비와 속리산 산나물까지 손수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 엄마께 며칠 전 작은 트러블 때문에 본의 아니게 화를 냈고, 엄마는 그날 밤 주방 한 켠에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어느 날 웃으며 말을 하니다. “그래도 밉지 않았다고... 내 딸이 하는건데 무엇이든 믿고 이해한다고 다 괜찮다고.” 말을 합니다. 간간이 느껴지는 가진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엄마는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애처로운 시선을 제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진통의 간격이 좁아질 수록 엄마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이내 산수유 열매처럼 저 모르게 눈물을 훔쳤습니다.

진통을 견뎌내다 잠이 들고 깨길 반복하던 어느 순간, 제 손을 따스하게 감싸 안은 채 잠이 든 엄마를 보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푸석하게 내려앉은 흰 머리카락도 보고, 손 끝에 촉감으로 느껴지던 굵은 주름살도 보았습니다. 선잠결에 하나님을 부르며 나지막히 기도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제 손과 눈이 엄마곁에 머물면 머물수록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꾸만 엄마를 만지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제는 마음이 조급한 아이처럼 울고만 싶었습니다. 한 번도 다정하게 부르지 못하고 그저 내 욕심만 채우는데 급급했는데... 엄마는 그런 날 미워하지도 않고 내 작은 신음소리 보다 더 아픈 모습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병동 맞은 편엔 몇 그루 나무가 있는데 나무마다 활짝 핀 꽃도 있고, 은빛 휠체어에 앉아 책을 보는 아이도 있단다. 그 아이가 책을 읽는 동안에 글씨체 하나 흔들리지 않게 아주 천천히 밀어주는 엄마도 있고 그 아이 뒤에는 등나무가 있는데 벤치마다 몇몇 낙엽이 와 앉아있네. 가끔 바람이 불 때마다 이쪽으로 손을 뻗으며 인사하는 다정한 눈빛, 엄마 생각엔 그런 것 같네. 재미있지? 또 궁금한 거 있어? 하늘? 음... 우리 딸이 어렸을 때 소풍가면 꼭 사달라고 조르던 솜사탕이 하늘에 둥둥 떠 있고, 검은 봉투가 회오리 바람를 만나 빙빙 춤 추는 모습도 저만치 보이네. 등나무 아래 모여 낙엽을 눈처럼 홑뿌리던 꼬마들이 조르르 봉투따라 달리는 모습도 보이고... 정말 우리 딸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네. 그렇게 어리게만 보이던 내 딸이 이제는 엄마를 준비하고 있다니... 참 대견하고 사랑스럽네\" 분만실에 들어가기 전 엄마가 들려주던 밖의 풍경입니다. 보이는 듯 정말 그림책을 펴고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엄마는 내게 그랬습니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생명과도 같고 너는 내 희망이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딸... 딸... 그리고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잠깐의 공백 사이를 가늠해보면 분만실 문이 닫히던 순간 이외에는, 몇 번 작은 고통과 한 번의 커다란 고통이 있었던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알겠습니다. 분만실을 나와 열 달 배 아프며 귀하디 귀하게 생각하던, 내 아이의 모습과 안부도 중요했지만... 눈 뜨기를 기다리며 지켜보던 엄마 얼굴을 마주하자 순간 울먹이며 어린 아이가 되고마는 까닭을...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생각과 너무 미안해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딸이 되어버리는 것을. 부모 마음은 부모가 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고 했던가요?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뼈와 뼈 마디에 한 아이의 집을 두고 세상 밖으로 그 아이를 본 다음에야 알 수 있다고 했던가요? 조금씩 커 가면서... 실은 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엄마한테 못되게만 굴었는지... 알겠습니다. 정말... 이제는 엄마의 그 큰 사랑을 알 것 같습니다. 임신 기간 중 부족한 것 없이 잘 먹어서 여느 산모보다 회복이 빠르다고 했습니다. 얼굴에 붓기도 많이 내려앉고 거동하는데 그리 큰 불편도 없었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며칠 전 엄마가 들려줬던 풍경들이 낯익은 시선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아이를 내려놓은 몸만 빼 놓고 밝은 빛에 스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조차 내겐 너무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세상에 모든 관심과 애정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만 보아도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이 모든 사랑을 알게 해 준 엄마, 엄마가 되어보니 늦게나마 그 위대한 사랑을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