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4회
개똥철학을 하다
처음 에세이 방에 들어와서는, 분위기도 잘 모르고 해서 종교 이야기는 가급적 피해서 글을 올렸다. 그러나 조금은 내 종교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 모태신앙(母胎信仰)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기독교의 교리(敎理)라거나 섭리(攝理)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부모님께서 기독교인 이어서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예배당엘 다닌 게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렇다고 부모님도 기독교적 교리라거나 섭리에 심취(深趣)하셨던 것 같지는 않다. 17세에 서양문물과 함께 기독교를 받아들인 어머니는, 돌아가시기까지의 80년 동안 기독교를 신앙으로 지키셨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와 내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따랐던 것 같다. 아마 부모님이 불교에 입문하셨더라면 우리 형제도 불교신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따라 무조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게 옳은 이야기겠다.
나는 지금 기독교감리회에 적을 두고 있는 동네의 ㅇㅇ교회에 40년 동안을 다니고 있다. 한 교회에 등록을 하고 40년을 충성했으면, 장로나 적어도 권사 직쯤은 꿰차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교회의 말단직인 집사로, ‘만년 집사’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나는 그동안 무늬만 기독교인이었던 게다. 주일은 반드시 지키고 헌금은 꼭꼭 지참하며 적게나마 십일조를 거르지 않는, 소위 말하는 ‘나이롱신자’다. 그래도 내가 어려울 때에는 잊지 않고 내 하나님을 부른다. 나는 원래 복이 많은 사람이고 덕이 많은 사람이라 하나님마저도 내 기도에 응답을 잘 하신다.
오늘도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하고는, 먼저 찬양대에 ‘그 사람’이 보이는가를 확인했다. 지난 주일엔 보이지 않더니 오늘은 멀쩡하게 앉아있다. 찬양대는 내가 늘 ‘내 자리’로 점을 찍어둔 지정석의 정면에 위치한다. 찬양대와 내 지정석의 사이에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웅장하게 놓여있으나, 찬양대가 무대 식 계단으로 자리를 잘 잡고 있어서 아무 곳에서나 한 눈에 볼 수 있다. 기도를 마치고 머리를 드니 그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나 보다. 알 듯 모를 듯 가벼운 목례를 한다. 약간은 넓은 이마에 꼿꼿한 콧날, 그리고 하얀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의 그는 늘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키도 아마 18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듯 언제나 멋진 풍체다. 가늠하건데 40 중반쯤으로 보인다.
으하하. 이쯤이면 내 글을 읽는 이들이, 내가 무슨 로맨스라도 즐기고 있는 줄 알겠다. 그러나 내 일찍이 그런 재주를 타고 나지 못했거니와, 외모도 그리 타고나지 못했으니 당치도 않다는 말씀이야. 내 사위가 50을 바라보는 데에야. 하, 세상이 별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겠지만, 나폴레옹의 사전에선 몰라도 내 사전엔 불가능한 일이로구먼. 푸하하. 이야기를 좀 더 끌어야 글을 읽는 재미가 깨소금 맛이겠지만, 혹 오해가 생길까 싶어 이쯤에서 이실직고(以實直告)를 해야겠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 교회에서의 일이다. 교회를 드나들며 청년부에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그가, 학교 앞 문방구점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두 아이의 학부모였으니까. 그는 언제나 깊은 볼우물이 패여 있었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그 볼우물이 굵은 주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눈두덩은 골을 만들고 긴 목은 점점 더 기린을 닮아가고 있었다. 병색이 눈에 띄게 깊어갈 무렵, 곧 문방구의 주인이 바뀌었고 한 동안 그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내가 식도암이라는 병을 얻고 수술을 끝낸 뒤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을 즈음. 그러니까 작년 이만 때쯤이었을까. 교회의 로비에 힘없이 앉아서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런데 왜 그렇게 마르셨어요?”하고 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20년 전의 바로 그 문방구점의 주인이었다. 이제는 건장한 몸으로 중년의 중후한 멋을 풍겼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교인들의 중보기도(어려운 문제가 있는 교인들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를 드림)를 맡고 있는 책임자였기 때문이었다.
“저도 위암 말기에서 수술을 받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이제 십팔 년째 버티고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그 길밖엔 없습니다.”
그랬다. 그가 문방구점을 떠나 내 시야에서 잠적을 한 것이, 위암을 선고 받은 뒤였나 보다. 그렇게 교회 로비에서 만난 뒤,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으나, 주일이면 그렇게 눈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가 보이지 않는 날에는 공연히 과장하여 좋지 않은 상상까지를 만들어 내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도 내 자리에서 내 모습을 찾지 못하면 그렇겠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이 있으니까.
인간에겐 종교가 꼭 필요하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꼭, 반드시 기독교이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불교도 좋고 유교도 좋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굳이 천당과 극락을 논하며 내세가 어떻다는 섭리(攝理)적 논리(論理)가 아니더라도 좋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려운 일을 맞을 때에, 종교는 무한한 힘으로 인간을 굳세게 만든다. 그러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만을 위해서라도 종교는 반드시 필요하다.
문방구점의 청년이 아니더라도 우리 교회에는 또 다른 간암말기의 환우가 있다. 검다 못해 청동색의 얼굴에 가발을 쓰고, 강대상의 정 가운데에 남편인 듯한 남자와 늘 나란히 앉아있다. 때로는 앉아있기가 힘이 드는지 남편의 무릎을 베고 눕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이미 손을 놓았다는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지금 죽음 가까이에서 종교에 매달리지만, 우리도 항상 그녀의 ‘죽음 직전’과 동일한 위험을 체험(體驗)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종교는 필요하다. 우헤헤. 오늘은 되먹지도 못한 ‘개똥철학’을 했구먼.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개똥철학’이나마 지껄일 수 있음이 얼마나 큰 보람인가. 내 병을 말하면서도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도, 살아있음으로 얻는 한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