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1회
덤으로 사는 삶
오늘부터의 글은 그야말로 오리지널 ‘만석이의 일기’겠다. 식도암환자로서 살아가는 그날그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남들이 듣기에는 좀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허나, 내 글을 읽는 이들이 힘든 일에 부딪칠 때에, 내 글이 용기를 줄 수 있는 용매(溶媒)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또 한 편으로는 나에게도, ‘살 잘고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촉매(觸媒)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도 가져본다. 그동안 나는 참 부족한 식견(識見)으로 세상을 살았구나 싶다. 세상은 이렇게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병을 얻은 후에야 절실하게 느꼈으니 말이다. 늘 내 잘난 멋에 살았는데…… 허허허.
내가 병을 얻은 후에 남편은 술이 얼큰해진 날이면,
“다시 살아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만큼 살아있는 나로서의 존재가 그이에게 절박했던 것일까. 별로 살갑지도 못했던 아내였는데……. 말이 나왔으니 우리 부부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어느 부부든 살을 섞어 살면서 다툼이 없지는 않겠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다툼은 늘 있었지만, 결과론적(結果論的)으로 말하자면 늘 해피엔딩이 되곤 했다. 가슴 넓은 그이의 포용력(包容力)에 내가 백기를 들었다고 말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그이가 져 주기는 하지만, 결국은 내가 진 꼴이 된다는 말씀이야. 후후후.
남편의 말대로, ‘다시 살았다?’ 이건 죽을 수밖에 없는 고비에서, 죽음을 이겨내고 살아났음의 의미렸다. 아니, ‘다시 살았다’고? 거 참 쉽지 않은 일을 했구먼. 그러고 보니 난 아주 장한 일을 해냈나보다. 이것도 이제야 알았으니 난 정말 모자라는 사람이로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남편은 살아나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하질 않는가. 이럴 땐 아주 고마운 일을 하나 더 해서, 다시는 잊지 않도록 각인을 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야. 무슨 일을 할까. 애시당초에 요조숙녀(窈窕淑女)이기는 포기하고 사는 여자였으니, 아침마다 섬섬옥수(纖纖玉手) 차려입고 문후를 들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발을 내려치고 정담을 나누기도 낯간지러운 노릇. 그럼, 아침 출근길에 대문까지 배웅을 해? 내일 아침 당장 실행을 해 봐봐? 그이가 심히 놀라 기절을 하지는 않으려나? 푸하하.
사실 우리 부부는 40여년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그렇게 정다운 부부는 아니었다. 그이는 그이대로 나는 나대로 하는 일이 각각이어서,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각각이었다. 그이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술자리도 많았다. 나는 양장점이 호경기를 누리던 터이라, 잠을 이길 수 없을 때에야 집으로 건너오곤 했다. 어제 하던 일의 뒷마무리를 핑계로 남편과 그이를 가정부의 손에 맡기고 출근을 하곤 했다. 기분이 썩 좋은 날은 그이가 가게에 들러 나를 보고 가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그렇다고 서로의 눈길을 피할 만큼 적대시(敵對視)하며 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의 금술은 지금이 생애 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헤헤.
내가 갑자기 매력녀가 되었다거나 전에 없이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건 아닐 게다. 애첩(愛妾)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죽음을 앞 둔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바라보며, 그이도 왜 만감이 오락가락 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없는 앞날의 본인(本人)도 상상했을 터이고, 어미 없는 아이들 생각은 또 하지 않았겠는가. 아마 김칫국을 마시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고생을 했다면 했을 터이니, 널브러진 처가 가엾지 않았다면 사람도 아니지. 이런 저런 상황을 겪고 보니 쭈그러진 마누라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이니 살아 준 것이 고맙고도 또 고마울 수밖에. 아, 그렇게 매력이 없는 마누라는 아니었나 보다. 그이는 얼큰한 술기운에라도,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파.”하는 양반이니까. 케케케.
그래. 까짓! 죽었다 치자.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삶’이다. 물건을 살 때도 덤은 항상 푸짐해 보이고 기분이 좋은 법이다. 나도 다른 이들에게 덤처럼 늘 푸짐하고 좋은 기분이 드는 삶을 살자. 그이에게도 푸짐한 아량을 베풀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분만 들도록 살자. 특별히 두 며느리에게는 푸짐한 아량과 좋은 기분을 배(倍)로 주자. 됫박으로 받으면 말로 주고, 말로 받으면 섬으로 주자. 어디, 내 식구뿐이랴. 친척에게도 퍼 주고, 친구에게도 퍼 주고, 이웃에게도 퍼 주자. 까짓, 돈 드는 일도 아닌데, 뭘. 이제부터는 덤으로 산다. 암도 이겨내지 않았는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