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통,
그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다.
생명 life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어리석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본질인 ‘생명(사랑)’을 잘 모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느냐 모르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인생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고 자살하고 번뇌하는 모든 일들이 바로 자신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들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 본질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육체라는 것을 가짐과 동시에 오감이라는 것도 지니게 됩니다. 이 오감이 외부 세계(객관 세계)와 작용하면서 주관이라는 세계가 생겨납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처음으로 피자라는 것을 먹어 보았습니다.
“야, 세상에 이런 맛도 있구나! 정말 맛있는데.”
이 사람의 기억에는 ‘피자는 맛있다.’라는 경험이 새겨집니다.
또, 어떤 사람이 피자를 먹었습니다.
“에이, 맛이 뭐 이래!”
이 사람한테는 ‘피자는 맛없다.’라는 경험이 새겨집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관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예지만, 그 외의 것도 모두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경험이 쌓여서 이루어진 주관적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접근해 봅시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의 내용물들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전부 우리가 자라오면서 경험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 나이, 성性, 생김새, 부모, 친구, 형제자매, 친척, 재산, 나라, 동네, 말(언어), 소유물, 출신학교, 애인, 그 외 수많은 지식과 경험들.
이 모든 것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곧 경험(과거)의 집합체요 기억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여 모든 기억을 상실한다면 과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없다면 ‘나’라는 경험의 집합체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관념은 우리가 거의 기억할 수 없는 어릴 때부터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나’라는 경험의 집합체는 더욱더 커지고 분명해집니다. 그러니까 자기라는 주관적인 세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고착된 경험의 덩어리,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자아(ego)’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생김새가 완전히 같은 쌍둥이라도 경험의 세계는 다 다릅니다.
결국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경험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으므로 비유를 해봅시다.
여기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에는 여러 가지 그림자가 비칩니다. 이 거울을 생명이라고 하면, 거울 속의 그림자는 오감을 통해 들어온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그림자도 있을 수 없듯이, ‘생명(살아 있음)’이 없으면 경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림자는 사라져도 거울은 존재하듯, 우리의 경험인 기억을 상실해도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려면 영사기에 필름을 넣고 거기에 빛을 비춰야 합니다. 필름에는 여러 가지 장면들이 찍혀 있습니다. 여기서 필름은 우리의 오감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인 경험의 세계가 바로 필름 속의 영상입니다. 그러나 그 영상이 움직이려면 빛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빛이 없으면 영화가 상영될 수 없습니다. 이 빛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생명(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생명이라고 하고 구름을 경험이라고 할 때, 구름은 사라져도 하늘은 존재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구름처럼 우리의 생명 위를 끊임없이 변하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수시로 변합니다. 한때는 사회주의가 좋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자본주의가 좋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경험이라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라면서 마음이라는 거울 속에 쌓인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오감이라는 필름에 찍힌 영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양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벗기면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100가지 경험이 쌓여서 ‘나’라는 관념이 되었다면, 한 가지씩 버리다가 100가지를 다 버렸을 때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경험(과거, 기억)은 실체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속의 바다에는 갈매기가 날지 않습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경험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한 바탕 세계, 즉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인 ‘생명’ 그 자체입니다. 거울 속의 그림자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거울 자체가 우리의 본질입니다. 필름 속의 영상이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필름을 비추는 빛이 우리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빛’이요 ‘생명’이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갖고 나온 생명 그 자체가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림자는 사라져도 거울은 존재하고, 구름은 사라져도 하늘은 존재하고, ‘나’라는 경험의 집합체가 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렇게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실체인 생명 에너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것입니다.
또 우리 몸을 봅시다. 우리 몸에서 변치 않는 실체가 있을까요?
우리 몸은 흙(살, 뼈 등등), 물(피, 콧물, 눈물, 오줌, 침 등등), 불(몸의 열기), 공기(호흡), 허공(콧구멍이나 허파의 빈 부분 등등)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머리, 팔, 다리, 심장, 허파, 간, 내장 그 어디에도 우리의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병원에서 우리의 몸을 해부해 보십시오. 그냥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하지 그 어디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썩으면 다섯 가지 자연의 요소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과연 없는 것일까요?
여기서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무한대로 확대할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 있다고 합시다. 이 현미경으로 우리의 몸을 무한대로 확대해 보면, 우리 몸의 세포가 과연 서로 붙어 있을까요, 떨어져 있을까요? 상상해 보십시오!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겠지만 한번 해 보십시오!
“오, 이건 말도 안 돼! 내 몸이 다 떨어져 있다니!”
그렇습니다. 당연히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텅 빈 허공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허공은 그냥 단순한 허공이 아니라, 어떤 에너지 장으로 가득 차 있어 우리의 몸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에너지가 바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는 변치 않는 실체인 생명 에너지인 것입니다.
이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숨 쉬게 해주고, 활동하게 해주고, 소화를 시켜주고, 생각하게 해주고, 사랑하게 해줍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수많은 경험도 가능하고, ‘나’라는 것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인 생명 에너지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만약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것은 영원하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리학에 보면 <에너지 불변의 변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형체는 변할지라도 그 본질인 에너지는 변치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우리의 생명 에너지도 그와 같습니다.
생명 에너지는 불변입니다. ‘생명(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쉽게 설명해 봅시다. 여기 두 개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싹이 나고, 다른 하나는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싹이 난 씨앗에는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에너지는 나중에 그 싹이 아름드리나무가 된 뒤에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비록 씨앗이 나무가 되어 그 형체가 달라졌을지라도 그 씨앗과 그 나무에 들어 있는 에너지는 같은 에너지입니다. 그렇다면 에너지 자체는 변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의 우리 몸속에 있었던 생명 에너지나 노인이 되어서 지니고 있는 생명 에너지나 그 에너지의 근본은 같습니다.
어릴 때 눈으로 한강을 봤다면 노인이 되어서도 한강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시력이 나빠질 수는 있지만, 그 ‘본다’라는 능력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은 죽지 않고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 에너지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그와 같은 변치 않는 영원한 실체인 ‘생명(사랑)’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