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일본은 단풍이 산 가장자리부터 연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참나무가 주로 분포된 우리나라 산과 달리 나무다리가 길고 뭉글뭉글한 잎을 간직한 소나무도 아니고 향나무도 아닌 암튼 그런 나무가 산마다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계곡을 끼고 들녘을 지나고 산을 돌아 우리가 가고 있는 온천으로 향하던 여행길은 아름답고 경이롭고 이채로웠다.
일본전통 집은 각이 딱딱진 형태이고 그 집엔 꽃들이 뭉텅이로 피어나고 밭가장자리마다 꽃들이 가을 색을 띄고 있었다. 집 밖엔 그릇이나 농기구나 박스하나 지멋대로 놓여 있지 않고 깔끔하고 단정했다. 미야자키 만화영화에 나오는 시골풍경 그대로였다. 커다란 나무와 숲과 메뚜기가 뛰어다니는 토토로의 풍경이 연상되었다.
디카는 잘 챙겨두었다고 찾으러 오라고 했다. 차고까지 가려면 시간이 필요로 한데 우린 여행지로 떠나야 할 시간이라서 나중에 청아가 찾아서 택배로 보내기로 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우산을 들고 있는 토토로가 나옴직한 일본의 전형적인 시골로 일 미터씩 일 미터씩 달려가고 있다.
아담한 휴게실에 들려서 사진을 찍었다. 청아의 낡은 디카가 있어서 그나마 여행지를 담아낼 수 있었고 상록이도 그나마 잃어버렸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신나게 여행을 즐겼다. 간이 휴게소 자판기 커피 맛도 내 맛에 맞았고, 화단 안에서 야생고양이도 만나고 진초록색 파라솔 나무 의자에 앉아 사진도 활짝 찍었다.
청아가 기획하고 연출하고 대본을 쓴 여행지는 내가 원하는 일본 시골과 산골을 지나 산속 온천호텔은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호텔 예약을 확인하고 키를 받아 7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는 세상에서 하나뿐일 것 같은 대각선으로 올라가는 승강기였다. 옆으로 가는 승강기는 티비에서 봤는데 45도 각도로 올라가는 승강기라니…….우린 어안이 벙벙……. 무지개색 문이 다보인다아아... 일층을 시작으로 빨주노초파남보.
방문을 여니 다다미 냄새가 났다. 현관입구 작은 도자기 꽃병에 한 송이 자주색 국화가 꽂혀있고, 넓은 방엔 꽃잎 끝에 보라색이 감도는 흰색 국화꽃이 또 한 송이. 베란다쪽 탈의실 너머 넓은 창밖엔 산속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청아도 상록이도 감탄을 한다.
일단 방구석 구석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일본에 왔음을 실감하고 참으로 일본인답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광고 카피도 떠오른다. 일본은 전통을 지키면서 현실을 알맞게 받아들이는 민족인 듯하다. 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남의 것도 일본에 맞게 받아들이는 현명하면서 약삭빠른 민족이지만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일본은 강국이 되고 관광일본으로 발전시키고 그 나라에 가고 싶게 만드는 국력을 배워야한다.
잠시 쉬었다가 저녁을 먹고 야외온천을 하기로 했다. 대자로 누워 있는데 청아가 커다랗고 둥근 까무스름한 찬합을 가지고 나온다. 열어보니 다기 세트가 들어 있었다. 방한가운데 있는 앉은뱅이 탁자에 둘러앉아 청아가 타주는 녹차를 마시기로 했다. 탁자위엔 여러 가지 과자와 차와 장아찌가 제각각 포장해서 네모다란 상자 안에 가득하다. 행복했다. 차와 다식과 딸과 아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분명 행복한 여자다. 아니 지금은 여자로는 행복하지 않았지만 엄마로써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련다.
청아는 여행 계획서를 작은 노트에 적어 그 시간에 맞춰 우리를 안내하고 시간에 맞춰 차표를 예매하고 먹을 것 까지 검색하고 호텔에 알아보고 해서 결정했다고 한다. 저녁 메뉴는 일본식 샤브샤브 아침 메뉴는 뷔페였다. 어디든 일본식 분위기와 풍경이 솔솔 풍겼고 맛도 우리 입맛에 맞았다. 친절하고 깔끔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깊이깊이 남을듯하다.
식사 후 방으로 들어와 일본전통 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옷이면서 실내복은 개량한 기모노였다. 우리나라 개량한복과 비슷한 용도로 쉽게 입고 빨 수 있게 만든 것인가 보다. 그 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일본사람 흉내를 내는 상록이 때문에 한바탕 웃기도 하고 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우기면서 야외온천으로 향했다. 입김이 후후 나오면서도 물속은 따스하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야경, 옆에서 일본말로 떠드는 여자들, 다른 외국인들, 우린 우리말로 수다를 다다다 떨며 이틀 밤을 보내고 있다.
새벽녘에 설핏 깨어보니 청아는 차를 홀짝홀짝 거리며 뭔가를 적고 있는걸 보며 나는 다시 다다미의 퀴퀴하면서도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청아는 그때까지도 안자고 탁자에 앉아서 우릴 보고 웃는다. 엄마랑 동생이랑 있어서 딸아이의 미소는 행복해요, 하는 것 같다. 안자고 뭘 했냐고 물어보려 했더니 흩어져 있던 옷가지랑 물건들을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정리를 해 놓았고, 펼쳐놓은 노트 속에 그동안 쓴 여행 지출을 깔끔하게 적어 놓고 노트 옆에 엔화가 놓여 있었다. “으응~~ 괜히 잠이 안와서 정리 좀 했어. 계산을 해 보니 이만 엔 정도 남을 것 같아.”
청아는 여행비를 예상하고 여행날짜와 차편을 맞춰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조사하고 불편하지 않게 딱딱 맞춰서 가이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편하게 앉아 있으면 청아가 안내를 하고 차편을 끊어오고 다음 행선지를 이리저리 다니며 물어보곤 했다. 행복했다. 가을햇살처럼 아늑하고 편안하고 느긋하고 낭만적이었다.
여자로서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었다. 그렇게 외롭다고 아이들한테도 친정엄마한테도 주변사람들한테도 글에서도 불행한 여자라고 투덜거렸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한 엄마가 되어 있다. 내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제 삶은 가을여행지처럼 풍성하고 포근해요, 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