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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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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 그후


BY 선물 2008-11-18

저, Y입니다.
불꽃다방에서 만났던.
그때 만났던 E가 맞으시다면 꼭 좀 답해주시길 바랍니다.

5년전 Y에게서 받은 이메일이다.
너무나 먼 세월을 건너 뛰어 온 이름.Y
선한 눈빛을 가진 아이.
어떻게 내 메일 주소를 알았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메일을 바로 삭제했다.
다만, 조금 놀랐다.

다시 한번 띄웁니다.
불꽃다방에서 만난 E가 맞다면 꼭 좀 연락 부탁드립니다.
4년 전의 메일이다.
주저하지 않고 메일을 지웠다.

그 후, 나는 다른 주소의 메일을 주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 사이트의 메일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메일주소로 다시 그 친구의 메일이 왔다.
내용이 간절하고 절박하다.
구구절절한 사연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날 찾으려고 수년 간 무척 애썼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왜 날 찾으려는 걸까.
다시 메일을 지웠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옛 메일을 찾았다.
그 친구의 메일이 쌓여 있었다.
읽었다.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애태우며 찾고 있을까.
안쓰러움이 나로 하여금 답장을 하게 했다.

네가 찾는 사람 맞다고.
잘 지냈냐고.

그렇게 시작한 메일이었다.
그 친구는 나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가 갖고 있는 기억 중 내겐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언젠가 그 친구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 줬다는 것도, 그 친구가 성당에 다녔다는 것도 기억에 없다. 너랑은 손잡은 것이 전부였지만. 이라고 적힌 글귀 또한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진짜 내가 그랬던가. 돌이켜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내 기억엔 그 친구의 이미지만이 남아 있다.
착하고 선하고.
그리고 잠깐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저 아인 나중에 참 가정적인 남편이 될 거라는.
그리고 참 좋은 사위가 될 것 같다는.
내 나이 그때 갓 스물.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냥 그 친구가 딱 그런 이미지였다.
어쩌면 나도 처음 잠깐 호감을 가졌던 것도 같지만 끝날 때는 그런 감정의 흔적 하나 지니지 않았던 인연이었다.

그 친구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은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드러내놓진 않았지만 확실히 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척 했다.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아주 반듯한 답장을 썼다.
내 생활을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소중한 아이들에 대해 정확하게 썼고 아무렇지도 않은 이런 메일도 더는 보내지 않는 것이 내 남편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잊지못해 애 태우는 것이 안타까워 답을 할 뿐이라고, 그리고 어쨌든 좋게 기억해 준 너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나와 만나기를 원했고 통화라도 한번 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나는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후로 끊임없이 계속 되는 그 친구의 메일에 수개월간 답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프다는 메일이 왔다. 눈물이 난다고도 했다.
자기 인생은 나를 찾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무조건 상투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짧지만 잦았던 그 친구의 메일을 통해 대충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그 친구도 결혼을 했고 딸아이가 둘 있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자리에 있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 같다.
일년에 반은 해외 출장으로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그래, 넌 잘 풀렸구나. 잘 됐네.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좋다는 친구에게 나는 묘한 질투를 가진다.
내 남편은 일이 잘 안풀려서 저렇게 힘들게 사는데 넌 여유가 있어서 지난 추억을 찾고 나를 찾고 그러는구나 생각했다.

대답없는 메일을 수개월 반복하다가 어느 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찾아내겠다는 글을 보냈다.
화가 났다. 답을 했다.
무슨 수를 쓸 건데.
넌 지금 네 감정에 몰입해서 나를 고통에 빠뜨리는구나.
너 때문에 난 평화를 잃었어.


미안하다는 답이 왔다.
너무나 가슴 아파서, 단 한 번 만이라도 만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훗날 많이 많이 늙어서 보자고 끝으로 답해주었다.
그 친구 옛날처럼 내 말을 잘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그러겠다는, 기다릴 수 있다는 답이 왔다. 핸폰전화번호를 적어놓고 평생 바꾸지 않을 테니 후일 언제라도 연락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그저 먼 발치에서 한번 만이라도 보고 싶었다고. 그게 전부라고.
 
정말 그 친구의 메일이 뚝 끊겼다.
그 친구가 잠깐 흘린 글 중에 흥신소 어쩌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집밖에 나서기가 조심스러웠다.
누가 나몰래 사진이라도 찍어서 그 친구에게 갖다준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그래서 연락이 바로 끊긴 거라면... 사진을 보고 놀라서...
차라리 다행이지 생각했다.
그 친구 아마도 축 처진 피부의 중년 아줌마를 떠올리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상이었고 내 주위를 서성거린 사람은 없었다.

어쩄거나 분명한 진실은 그 친구가 순정의 맘으로 편지를 쓰고 또 쓰는 상대는 지금의 내가 아닌 24년 전의 E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나이가 다 된 딸아이가 있는 가정주부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메일이 정말로 끊어지자 그 친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미련 따위 가질만한 감정을 겪었던 친구도 아니고 그저 갑자기 자기 맘대로 내 인생에 개입해서 부담을 갖게 한 친구일 뿐인데 이 궁금증의 실체는 또 무엇인지.

그러면서도 한편 홀가분했다.
그런데 2개월 정도 뜸하더니 다시 메일이 왔다.
또 이렇게 못 참고 메일 보내서 미안하단 말과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짧은 글.
물론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참으로 얄궂은 심사다.
나는 끝까지 정숙하고 반듯한 여자로서 한치 오점도 남기지 않으려 하면서도 평생 나를 향한 순정을 바칠 남자의 존재는 은근히 즐기려 하는.

그런면서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다시 인연이 이어지기도 하나보다.
부부 사이가 데면데면할 때, 나 스스로를 찾고 싶다는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더구나 예전에 사랑하다가 안타깝게 헤어진 사람이라면 정말 뒤늦게 불이 붙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따위를 보며 남자와 여자가 직장이나 다른 활동 때문에 만나서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지면 뜻하지 않게 사랑의 감정이 싹틀 수도 있겠다 생각해 왔다.

남편이 있는데도가 아니라 남편 때문에 도리어 더 외로워지는 아내도 있다.
그럴 때 따뜻하게 대해주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배려해주며 나를 귀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자는 흔들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그런 설정 속의 주인공이 되더라도 뒷걸음질 할 사람이다.
일단 겁이 많고 주위의 비난이 두렵고 뒷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살짝 생각을 바꿔 까짓 한번 만나주는 것 쯤 어떨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발짝 내딛는 것으로 운명의 바퀴는 방향을 달리 한다.
그래서 한발짝이 무서운 법이다.

물론 지금의 내겐 그 문제에 대한 어떠한 갈등도 고민도 없다.
전혀 유혹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위로는 된다. 모순된 감정이다.

그 친구의 아내는 흔들리는 남편을 조금이라도 눈치 챘을까.
나처럼 남편을 100프로 믿고 있을까.
만약 지금의 내가 그 친구에게 흔들리는 마음의 여자였다면 상황은 얼마나 심각해질까.

Y는 정말 가정적이고 도덕적일 것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추억 속 여자를 찾게 만들었을까.
단순히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과거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누구보다 가정적인 내 남편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