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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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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버지...(4)


BY 솔바람소리 2008-10-26

엄마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한 사춘기로 접어든 나에게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

내가 태어났다는 신혼 1년간의 <덕소>

에서의 생활을...

 

20kg하는 정부미가 680원쯤 할 때

두포대로 시작한 신접살림이라고 했다.

엄마가 태어나서 제일 많이 굶주린 때였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이 아버지와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니 보지 않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한 입맛 하시는 아버지가 그 시절엔 김치가

없어서 남이 속아버린 배추 잎을 엄마가 몰래

주워다가 양념도 없이 소금만 넣은 것을 ‘김치’라고

드려도 맛있게 드셨단다.

국수를 처음 삶아 본 엄마가 물과 면을 함께 넣고

삶아서 죽이 되어버린 것을 건네도 인상 한번 구기지

않고 드셨다고도 했다.

 

엄마의 그 말씀에 나는 왜 문득 생각하고 싶은 않은

지난 일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아니다. 겉으로는 태연한척

행동했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약한 몸뚱이보다 더

쇠약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탈하게 지내던 날에도 학교 수업 중에 분필로 칠판을

가득 채워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버지가

엄마에게 했던 무서운 행동들이 떠올라서 대성통곡을

해대기도 했을 당시니까,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언젠가 개구리 소리 요란한 어느 여름에

해가 채 저물지 않은 시간에 모처럼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엄마가 만드신 소머리고기가 냄새 난다는 이유로

잘 먹고 있는 우리들의 밥상을 아버지가 들어서

저만치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초토화된 방안에서 우리

삼남매는 입안에 씹고 있던 고기도 삼키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방바닥부터 벽과 천장에 이르기까지 음식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방안에서 입을 굳게 다문 엄마가

잠깐 주춤하다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얼른 동생들 데리고 나가!’...

나와 엄마는 눈으로도 얼마든지 말이 통했다.

이골이 나도록 반복했던 피신이었기에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의 뜻대로 얼른 동생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엄마가 특별히 입 밖으로

내게 동생들을 지키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자연스레 생겨난 동생들을 향한 보호본능이었다.

밖으로 향하던 내가 엄마도 함께 피했으면 좋겠다는

불안함으로 뒤돌아보았을 때 나는 또 보았다.

엎드린 자세로 엎질러진 것들을 치우시는,

나 때문에 세상 살아간다는 불쌍한 내 엄마를 향해서

아버지가 로버트 태권V의 훈이처럼 힘찬 발차기를

하는 것을... 그리고 좀 전까지는 음식이었지만 이제는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들 위로 힘없이 쓰러지는 엄마를...

나는 생각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난다는

‘짱가’가 정말 이 세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제발 못된 내 아버지 좀 무찔러 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얼른 동생들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남자도 들기 힘든 생선이 가득담긴 프라스틱 가구를

높은 배에서 번쩍 들어 내리던 깡다구의 엄마가 왜

아버지는 번쩍 못 들어 버리는 걸까? 엄마는 내게 매일

밥을 많이 먹어야 힘이 세진다고 했었다.

나는 엄마가 밥을 더 많이 먹어서 아버지가 던졌던

밥상처럼 아버지를 번쩍 들어 올려서 던져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별별 생각을 다하며

동생들과 나란히 울며 이모네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할 수 없는 아버지였다.

우리들은 아무 냄새도 못 느끼며 맛있게 먹던

고기였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고 화를 냈는지

아마도 밖에서 키우는 개를 그렇게 예뻐하더니

아버지 코도 개 코를 닮아가나 보다고,

내가 동생들을 이모네 대문에 남겨두고 다시 엄마에게

돌아와서 함께 밤이 깊도록 숨어있던 토끼우리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했더니 그 와중에 엄마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작은 소리를 내고 웃기도 했었다.

그 후, 나는 밥상에서 수저를 들고 찌개를 떠서 한 입

떠먹는 아버지의 인상을 살피는 버릇까지 생겨버렸다.-

 

주먹밥 한 덩이만 싸주면 몇 리쯤 떨어진 높은

산에 올라, 그 산만큼 높이 쌓인 장작을 짊어지고

내려와야 겨우 보리쌀 두되 값밖에 안됐단다.

그래도 간난장이 딸의 목욕을 서로 시키겠다고

장난질로 실갱이도 벌이며 신혼 재미를 느끼기도 했었단다.

덮을 이불이 없는 긴긴 겨울밤도 몇 안 되는 옷가지로

나만 돌돌 말아서 아랫목에 누이고 위풍이 강한 방에

얼음이 얼 정도로 쌀쌀해도 둘만의 체온으로도

행복하게 견딜 수 있었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