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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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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절이


BY 길가는 나그네 2008-10-15

며칠 전에 ‘겉절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16년 동안 내 힘으로 해본 김치가 숫자로도

헤아릴 정도로 몇 안된다.

총각김치 3번, 깍두기 1번, 파김치 1번, 포기김치 1번,

배추김치 2번, 겉절이2번.

건망증 수준이 날로 번창하지만 정확한 통계다.

늘 친정엄마가 해주시는 것을 먹고 살지만

신혼 때부터 ‘엄마가 없으면 나는 이제 김치를 못 먹는 건가?’

하는 불안한 마음에 나름대로 홀로서기를 준비했었다.

김치가 떨어질쯤 한번씩 시도해 보았지만

늘 재료가 아깝다는 결론에 다다르곤 만다.

곁에서 지켜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것이

어쩌면 그리도 날 힘겹게 하는 건지...

미각과 후각이 남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발달했음에도

번번이 짜다 못해 쓴 약을 만들어 버리던지,

양념된 배추가 점점 생기를 되찾아서

“나 좀 밭으로 보내줘!!!” 하고 아웅성을 떨게 만든다.

처음에는 때깔부터 모양새가 그럴싸 하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버무티티해지는 꼴이 자장면으로 목욕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을 비롯해서 아이들이

내가 만든 김치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차라리 말자, 하던 김치였다.

 

하지만...

 

작년 김장김치를 벌써 3번이나 친정에서 공수해 먹었건만

벌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치 냉장고에 한통만은 아껴먹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손도 대지 않았었다.

그 아끼던 것을 개봉하던 날...

내 눈을 의심했다.

통을 열자마자 보인 것이 새하얀 눈이었다.

이제 막 접어든 10월에 ‘눈’이라니...

살림 잘하는 ‘여편네’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하얀 눈을 걷어낸 김치에서 군덕내가

물씬 풍겼다.

꿀렁꿀렁한 날씨만큼이나 맑지 않은

마음으로 가까운 시장으로 향했다.

싱싱한 배추 5포기가 5천원이란다.

시세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 판단조차

하지 못하는 나는 다듬어 놓은 쪽파도 조금 샀다.

생강은 친정에서 손수 만들어 주신 가루로 넣으면

될성싶었다.

커다란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보일러실에 처박아 놓았던 함지박을 꺼내어서

겉절이 모양새로 다듬어서 소금을 뿌렸다.

양념은 그런대로 흉내 낼 수 있겠는데...

늘 야채를 소금에 절이는데서 실패를 일삼기에

부담백배였다. 몇 시간에 걸쳐서 뒤집고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웬만큼 된 것 같아서 씻어서 헹구었다.

올해 수확한 보내주신 ‘친정 아빠표’ 고추 가루와

슈퍼에서 구입한 멸치 액젓, 약간의 미원, 뉴수가,

마늘, 파, 생강가루...를 넣고 버무리니

역시나 모양새는 그럴싸했다.

한참을 버무리다 간을 보니 영 싱겁다.

겁 없이 나는 또 소금을 한 주먹 넣어 버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짰다.

아... 왜 번번이 나는 이 모양인지...

어쨌든 의무(?)는 다했다, 싶은 심정으로

김치 통에 담아 놓고 저녁상에 올릴 것은

참기름 약간과 참깨까지 넣고 버무렸다.

나 역시 다시 간을 보기가 두려운 김치였다.

저녁...

아들이 빨갛게 먹음직스러운 김치 쪽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

“엄마, 이건 누구네서 가져 온 거에요?”

이제는 새로운 것만 보이면 당연한듯

주변에서 들어 온 것으로 여기니...역시

나는 살림 잘하는 여편네...

“엄마가 한 거야”

덤덤하게 대꾸한 내 말에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가던 젓가락의 방향을 틀어 버린다.

‘......’ + 무안 + 뻘쭘 = ?

녀석의 반사적인 행동에 섭섭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엄마, 왜 그러셨어요...”

“...뭐얼...”

“힘드신데...”

느물느물... 엄마 걱정 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제 입을

걱정하는 녀석이 얄밉기까지 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힘들어 보인다.”

“헉!!! 왜요?”

“그 김치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잖아.

니 머리가...“

“아니에요. 제가 언제요...”

녀석이 다시 젓가락을 겉절이 쪽으로 향했다.

녀석의 그날의 표정...

과장이 아니었다.

사약을 받아 넘기듯 바짝 긴장한 모습이라니...

입 속에 넣은 그것을 씹을 때 혀를

바짝 입 천정에 붙이는 듯 했다.

애쓰는 녀석의 모습이 나를 더욱 당황시켰다.

“어?... 맛있네?...”

.

.

.

그 날 저녁 웬일로 술을 먹지 않고 들어온

남편이 상에 올라온 김치를 보고 말했다.

“이건 누구네서 가져 온 거야?”

.

.

.

아들의 모습을 똑같이 재방송하던 남편이

어제 저녁 내게 말했다.

“김치에 다시 어떻게 양념 좀 해봐봐.”

“왜?”

“이 사람아 김치가 점점 살아나잖아.

간을 좀 더 하던지... 뻣뻣해서 어찌 먹겠어?“

.

.

.

나는...생명을 소중이 하고 픈 사람이다.

그래서 모기를 죽일 때도

‘좋은 곳으로 가거라’ 빌어주는 착한(?)사람이다.

그런 내가 배추를 죽일 수는 없다.

겉절이를 두 번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말했다.

.

.

.

“그냥 먹어...”

.

.

.

나는 정말 잘하는 게 없는 여편네다.

부디 우리 엄마 오래토록 살기를 기원한다.

내가 김치를 잘하는 날을 기다리기보다는

<젊어지는 샘물>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