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2시쯤이었다.
같이 산 세월 탓일까, 남편을 향한
나의 직감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수준이다.
두근거림이 심하면 영락없이 술이 취해
들어와서 그냥 자는 법이 없다.
안정적인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 멀쩡한
정신으로 귀가하곤 했다.
그제 저녁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아들에게 전화 좀 해보라고 했다. 아빠 뭐하시나...
전화를 걸었던 아들이 ‘안 받아요.’ 한다.
잠이 안와도 기를 쓰며 자려했다.
비몽사몽 겨우 잘 들쯤 남편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서부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뒹군다.
심상찮음을 깨닫고 아들의 방문을 닫았다.
“조용히 자.”
“알았어!!! 조용히 잘 거야!!!”
며칠 전 언젠가 공부를 목적으로 사뒀던 디지털녹음기를 찾아서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었었다. 그것을 꺼내서 ‘녹음’을 누르니
배터리 없음이 표시 된다.
난 늘 이런 식이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벗어나야했다. 벅차게 험한 세상
어디서든 고비야 찾아 들겠지만 남편으로 인한 우리들의
불안은 떨쳐내야 했다.
증거를 하나씩 만들기 위해서 하나둘 준비해놓고 있지만
어느 때는 깜빡 잊고,
또 어느 때는 건전지가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준비 됐을 때는 어쩐 일로 남편이
나를 꿰뚫은 것 마냥 정말 조용히 잠이 든다.
내 운명의 장난은 늘 이렇게 빈번했다.
늘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기 일쑤이니...
“씨이~팔...년... 니가 왜 우리 형한테 뭐라고 해!!!”
적막을 깨는 남편의 말에 낮에 일이 떠올랐다.
낮에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시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틀 후에 있는 아버님 제사에 내려가실 때
시험 끝나고 학교가 목요일부터 <자유휴업일>로 쉰다는
아들도 함께 데려가 가달라니 제수씨는 뭣하고
아들만 보내냔다. 딸아이를 이유로 드니 동생에게 맡기면 된단다.
어쩌면 그리도 양심들이 없는 사람들인지
이제 여러모로 독하게 마음먹은 내가 대꾸했다.
“아버님 제사에 아들도 가지 않는데 제가 그 자리에 뭐 하러 가요.
그런 말씀 동생한테도 해보세요. 저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XX이도 생각해서 보내는 거라구요.“
싫은 건 곧 죽어도 싫은 나였다.
한번 아니면 절대 아니던 나였다.
그런 내가 나를 죽이고 지금껏 살았다.
몇 개월 전, 수술하고 누워계신 시어머님의 병원비가 없어서
퇴원을 못한다는 말에 7남매가 조금씩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내 말에 남편은 뻔한 말류를 했다. 나는 60만원을 보내 드렸다.
병원에 수술하고 입원해 있을 때도 7남매를 두신
어머님 곁에서 병간호 할 사람이 없다는
말에 훗날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
서울에서 광주까지 내려가서 꼬박 이틀을 있어드렸다.
차비도 엄마가 마련해 주신 돈으로...
엄마는 당신도 며느리 얻으셨지만 “내 딸처럼 착한
며느리 둔 네 시어머니 그래도 복 받으셨다.“며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딸을 응원해 주셨다.
시원찮은 치아를 생각해서 챙겨간 과일 통조림을
수북이 꺼내놓으니 뭣 하러 그 많은 거 가져 왔냔다.
어머니는 그 많은(?) 것을 하루 만에 모두 드셨다.
곁에서 누군가 치킨 먹는 것을 보시던 어머니께서
침을 넘기시기에 안쓰러워서 시켜드렸다. 커다란 닭다리
두 개를 드시고도 날개까지 더 드셨다. 그리고는
입맛이 없어서 더는 못 드시겠단다.
입도 안된 나에게는 먹어보라는 말씀도 없으신 분이
남긴 것을 늦은 저녁 잠깐 들린 큰 시숙님 내외께 내놓으신다.
섭섭해도 내색 않고 내 엄마에게 한 것처럼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드렸다. 식사를 하실 때면 반찬을 놓아 드렸다.
물리치료 받으실 때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님 손을 꼭
잡아 드리며 “저희 어머님 안 아프게 살살 해주세요.”
라고 물리치료사에게 부탁드렸다.
비위 약한 내가 화장실에 모셔드리며 바지를 내리고 입히며
닦아 드렸다. 아침저녁으로 틀니 닦는 것을 챙겨드리고
뒤처리까지 말끔하게 처리해 드렸다.
나 말고 찾은 며느리는 큰형님 말고 없었다. 하나뿐인
딸도 엎어지면 코 닿을 때 살면서도 하루 있던 것을 끝으로
머리 아프다는 이유로 찾지 않았다.
내게 아버님 제사 운운하던 시숙님도 형님도 한번 찾지
않았고 빈곤하다는 이유로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 어머님께서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참 정이 많은 애다. 그래서 아이들 잘 키울 거야.
밥 먹을 때마다 생각나겠다. 반찬 올려주던 거...“
무뚝뚝하신 분이 눈시울을 붉히며 하신 말씀에 섭섭함과
피곤함이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해남까지의 거리를 남편이 가지 않아도 어린 두 아이 손을 잡고
명절이면 찾으려고 기를 썼었다.
그것이 당연한 도리인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내 부모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그럼에도 그런 공을 지금 나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말 뻔새 없는 어머니, 함께 모여도 어울릴 줄 모르는 가족애,
그런 속에서 자란 남편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기에 받았던 자신의 상처를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줘서는 안됨을 남편은 생각이란 것조차 해봤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