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창업박람회 65세 이상 관람객 단독 입장 제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97

삶이 속일지라도 4


BY 그림이 2008-10-04

새집은 돈 쓸 일이 자꾸 생긴다. 물받이도 해야 되고 세를

놓으려면 부엌도 꾸며줘야 한다. 다른 집은 이사 한다고

가구를 사고 집떨이를 한다고 야단이지만 나는 그럴 처지가

못 된다. 같은 직장인끼리 살 수 있는 집은 장단점이 있다.

집에서 일어난 일들은 출근하면 소문이 나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돈 빌릴 일이 있으면

밤에라도 가면 빌려 준다. 억지로 빚을 내어 지은 집은

남편의 낭비벽을 실어줬다. 마누라 벌고 또 집까지 장만했으니

돈 빌려 쓰기는 더 좋았다. 방학이 되어오면 선생들을 부른다.

흥청망청 돈을 쓰도 동료를 나무라지 않고 인정한 셈이다.

돈을 보내주고 안보내주고 내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때는 전신환으로 돈을 보내줬기에 간혹 직장으로

우편물이 부쳐오면 누런 편지 봉투에 넣어 온 전신 요금을

햇빛에 비춰보며 가까이 지낸 수위들이보고 이달에

상여금이 있는 달인데 요거 보내 주느냐며 저들끼리 진담

반 농담 반 했지만 속으로 이것도 달마다 오면 얼마나 좋으련만

보내야 보내는 거다. 나는 장사를 계속해야 했다. 남편 근무지가

울릉도라 오징어 다섯 축을 부쳤다. 그것을 심심풀이로 먹을 내

처지가 아니다. 시장에 가서 비슷한 크기에 값을 물어보고 조금

싸게 팔았다. 좀 사달라는 주문이 요란하다. 옳지 남편과 의논해

오징어 장사를 해 보자. 현장 직원들은 여자가 많았기에 조금

이라도 괜찮다 싶으면 금방 동이 난다. 봉급은 다 쓰더라도

장사해서 남으면 그게 그거겠지 남편에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 하도록 당신이 할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는

답이 이틀 후 왔다. 도매상과 거래가 아닌 생산자와

거래는 내가 헐하게 팔아도 수입이 괜찮았다. 좀 싸게 파니까

한 사람이 몇 축씩 사갔다. 그 때만 해도 현금으로 봉급을 줄때라

나는 외상으로 팔고 봉급 날 봉투에서 오징어 값을 떼고 주니 힘들게

받을 염려도 떼일 염려도 없었다. 명절 때가 되면 조금이라도 싼

가격으로 파는 나의 게 사가기 때문에 땅 짚고 헤엄치기다. 어떤

친구는 해인사에서 장사를 하는 친정집에 내가 물건을 대 주도록

까지 해 주었다. 집에 오면 아이 둘을 재워놓고 빨래하고 소재하고

장부까지 정리 하자면 12시는 금방이다. 그래도 재미가 났다. 한

일 년쯤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연락이 왔다. 오징어가 오를 조짐을

보이니 한몫 좀 많이 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을 거금을 부쳤다.

아무리 있어도 오징어가 오지 않았다. 처음엔 배가 떠질 않았느냐고

생각 했지만 너무 긴 시일이 걸렸다. 학교에 전화를 했다. 곧 간다는

말만 하고 물건은 오지 않았다. 벽지 근무가 끝나고 삼월이면 육지근무

발령을 앞둔 남편은 또 저지레를 하여 그 돈으로 몽땅 빚 갚았단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봉급 너 댓 달 치다. 봉급을 쓰면 됐지 그것까지도

사는데 도움이라고 안 되는 남편이다. 그 무거운 것을 남의 눈치 보면서

통근차에 싣고 다닌 내가 한없이 불쌍했다. 남은 나를 도와주려고 일부러

나의 게 사는데 남편은 이러니 맥이 확 빠졌다. 내가 갚은 빚이 다시

늘었다. 바람 난 남편 바람이 영판 나서 나와 이혼을 해주면 차라리

낫겠다. 이혼 하자면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사랑 나의 겐

호사스런 사치다. 나는 내 새끼와 먹고 사는 일이 최우선이다.

집에 오면 마루에 된장종지 김치그릇 밥그릇은 방에 먹다 남은

과일은 부엌에 온 집을 헤집고 다니며서 먹으니 우리 집 꼴이

상상이 되겠지요. 그래도 큰 아이는 엄청 동생을 챙겨 동네

사람들이 보면 먹을 거 큰 것은 꼭 동생 손에 쥐여져 있다고 했다.

남편 보다 6살짜리 큰 아들이 나를 더 도와주고 있었다. 같은 직장인

끼리 사는 동네라 내가 엄청 덕을 보고 산 셈이다. 그럭저럭 한 해가

흘렀다. 나의 게도 때가 왔다. 유류파동이 왔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집값이 배도 넘게 올랐다. 돈을 모아서 집지은 사람이나

나와 같이 빚으로 지은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자연히

전세도 올랐다. 방 두 개 세놓던 것을 하나만 놓아도 되었다.

결혼한 여동생을 우리 집에 살아 달라고 애원을 했다. 제부와

의논 끝에 한집에 살게 되었다. 그럭저럭 빚도 거의 다 갚게 되었다.

동생은 집세 공과금은 완전 공짜로 살고 나는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오시면 우리 동생이 질색을 한다. 아이들 봐주며

언니를 돕기 위해 한 집에 사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아이들 봐 주는

사람으로 여기고 가끔 나를 기를 죽이려고 애매한 소리도 하시니

듣고는 못 있겠다면서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다. 방학이 되면 까다로운

형부도 싫다고 했다. 자랄 때 오빠와 여동생 삼 남매는 딸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엄마 아버지의 금슬도

좋아서 큰 소리가 나지 않던 집에 자라다 맏시숙께서 가산을

탕진 해 결혼 다음 날부터 형제들끼리 시어머니와 큰 아들과의

싸움이 끊어지질 않아 나는 질급을 했다. 그 중 나의 남편도 시댁

말썽장이 중에 속했다. 시숙과 시동생이 고대를 나온 걸 고종

시누이가 고대 다니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져 일 년을 남겨놓고

취직했다고 하면서 결혼 전 돈 모아 놓은걸 알고는 일 년만

시키라고 졸라대고 그 소리를 시어머니께 말해 시어머니도 내가

돈이 엄청 있는 걸로 알아 끝없는 낭비벽에 가짜 학력에 나는

너무 온실 속에 컸고 엄마 역시 가난한 남편을 만나 부자 집

막내 딸 인 엄마는 아버지가 처가에서 기 못핀 게 한이 되어

논을 팔아 사위 학비며 취직 경비까지 대주면서도 절대로 남편

한테 돈 쓴 유세 말고 돈 버는 유세 말으라고 당부했다.그게 맞아

떨어져 남편은 온갖 거짓말로 돈을 울겨냈고 나는 남편 시키는대로

하고 말만 하면 거짓말을 매번 속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