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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이별


BY 진실 2008-01-17

사랑과 이별


나는 사랑하는 기술보다 <이별하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본
다.
서로 첫눈에 반해 열렬한 사랑에 빠져들게 된 커플이 있다고 하
자. 그들에게 있어 사랑하는 기술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
탕달의 [연애론]을 꼭 읽을 필요도 없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을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행위는 본능적 충동에 속하
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본능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서
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즐겁고, 그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
실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우리가 흔하게 쓰는 한자숙어에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는 말이 있듯이, 만남 뒤엔 반드시 이별이 따라오게 마련인 법이
다. 사랑이 언제까지나 뜨겁고 열렬한 상태로 지속될 수는 없다.
사랑 끝에 반드시 <권태>가 오고, 권태감이 극한점에 이르면 <이
별>이 온다.
<사랑-권태-이별>은 모든 연애행위에 있어 정해진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녀가 일단 사랑에 빠져들게 되면 그들
사이에 권태나 이별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억지로라도 부정하려
고만 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랑의 비극이 있고 돌연한 이별
끝에 오는 정신적 외상(外傷)이나 치정살인 같은 게 있다.
사랑은 언제나 동물적 충동에 의해서 시작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욕>이 바로 사랑의 원동력인 것이다. 정신적 사랑 또
는 플라토닉 러브 같은 개념은 동물적 성욕을 당장 풀어 버릴 수
없을 때 생겨나는 대상적(代償的) 자기보상심리의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를테면 도저히 육체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짝사랑>이 오래 지속될 때 정신적
사랑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그것 자체만 가지고서도
육체적 오르가즘의 대체효과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정신이나 육체 중 어느 한쪽만 가지고서는 살아나
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랑 역시 정신과 육체가 서로 조
화되고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묘한 자기조절 능력이 있어서, 정신이 허
전할 때는 육체를 통해서 그 정신적 허기증을 위로받을 수 있고,
육체가 허전할 때는 정신을 통해 육체적 허기증을 위로받을 수 있
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다.

얼핏 보면 아주 편리하고 합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특성 때문에 오히려 정신과 육체의 극단적
괴리현상이나 상호간의 불협화음을 조성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은 일단 육체적 층동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육체
적 충동에 의한 본능적 욕구가 만족되면 사랑은 없어지고 오직 권
태감만이 남는다. 이것은 우리가 음식물을 먹는 행위나 대소변을
배설하는 행위와도 같다. 배가 몹시 고플 때는 머리 속에서 계속
맛이 있는 요리의 환상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음식에 대한 <그리
움>에 사무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짝사랑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일단 식욕이
충족되고 나면, 빈 그릇에 남은 음식 찌꺼기들이 아주 불결하고
지저분하게 보이고, 내가 언제 그토록 저 음식을 <그리워>했더란
말이냐 하는 식으로 오리발을 내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몹시 배
고플 때는 남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이 부럽게 보이지만,
내가 배부른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모
습이 아주 천박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 때문이다.

또 같은 메뉴의 요리를 계속해서 먹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음
식에 <물리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음식에 물리게 되는 것과
사랑하다가 권태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심리적 패턴에 있어 거의
똑같은 종류의 메카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소변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속담에 <똥 누러 들
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는데, 사랑의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소변 또는 대변이 몹시도 급할 때는 변소가 더러우냐
깨끗하냐, 양변기냐 재래식 변기냐를 따지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
다. 그저 변을 볼 장소가 생겼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형
편이 된다.

그러나 일단 변을 보고 난 후에는, [그 변소 참 더럽네] 어쩌네
하는 식의 불평이 튀어나오게 되고, 내가 언제 변을 봤더냐 하는
식으로 그 고마운 변소를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어지게 되는 것이
다.


우리가 평생 동안 똑같은 요리를 먹을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랑
에 빠지는 행위에 있어서는 이상하게도 평생 동안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동안 너무나
굶주려 왔기 때문에 <시장이 반찬>이요 <기갈(飢渴)이 감식(甘
食)>이라는 식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같이 설렁탕만 먹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육개장이나 우거지탕으로 바꿔먹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권태>의 심리다. 그러다가 아예 <우거지탕>으로
메뉴를 바꿔 버리고 나면 그것은 바로 사랑에 있어서의 <이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설렁탕과 이별>인 셈이
다.

설렁탕을 먹다가 우거지탕으로 바꿨다고 해서 죄가 될 수는 없
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만은 그것이 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설렁
탕을 <배반>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그래서 처음에 사랑을 시
작할 때는 서로가 물고 빨고 하면서 그저 좋기만 하다가 나중에
이별하게 될 때는 서로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마는 현상이 나타난
다.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만남 뒤에는 이별이 있고, 또 이별이 있기 때문에 만남이 있다>
는 것이다. 그래서 시 <님의 침묵>의 화자(話者)는 이별을 슬퍼하
다가 결국 이별 후에 오는 새로운 만남에의 기대감 쪽으로 이별의
슬픔을 승화시킨다.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에서 수없이 되풀이해 가며 이별을
예찬하고 있다. <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시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터인데, 그 시에서 만해는 <이별은 미의 창조행위요 미는 이별
의 창조 행위>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현명하게 하는 비결은 미리부터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 무조건 헤어지겠다
고 미리부터 결심을 한 상태로 사랑을 시작하라는 말이 아니라,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사랑을 시작하라는 말이다.
이별에 있어 누가 먼저 버렸느냐(또는 찼느냐) 하는 문제는 별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행위는 두 사람이 각각 50퍼센트씩의 책임과 의무를
반반씩 나눠 갖고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이쪽에서 버림
을 받았다고 해서 이별의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전가시킬 수는 없
다.

권태를 느낀 쪽이나 권태를 느끼게 만든 쪽이나, 다같이 책임이
있다. 아니, 책임이라는 말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사랑이 오래가
면 반드시 이별이 찾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에, 어는 누구의 책임이
랄 것도 없이 당연히 이별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
야만 정신적으로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상대방을 버리기 전에 상대방이 나를
먼저 버려 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신나는 일인가. 나는
아무런 책임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낄 필요 없이 또다시 새로운
사랑, 말하자면 새로운 메뉴의 요리를 즐길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자들끼리 하는 말 중에 <여자는 버스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
다. 버스를 한번 놓쳤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곧 새 버스가 오게
마련이듯, 여자 역시 그렇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여자만 그런가. 남자도 마찬가지다. 평생 동안 사
랑할 기회가 단 한번만 찾아오는 법은 없다. 언제나 우리는 사랑
을 찾아 해맬 수 있고 또 사랑이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다. 죽는
날까지 우리가 <먹는 행위>를 계속해야 하듯이 사랑하는 행위 역
시 평생 동안에 걸려 이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끝에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좀 문제가 복
잡해진다. 하지만 최근에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보
면, 이제는 이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
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결혼은 평생 동안 단 한번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떤 상대방을 배우자로 선택해야 할까. 될 수 있는
한 물리지 않는 음식을 골라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매일 먹어도 싫증나지 않는 음식인 <밥> 같은
것으로 말이다. 반찬 없이 밥만 먹으려면 좀 싱겁고 짐짐하다. 그
렇지만 밥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밥을 주식
으로 삼고 있다.

밥이 우정의 상징이라면 반찬은 연정의 상징이 될 수 있는데,
따라서 꼭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경우에는 동지나 친구와 같
은 배우자를 찾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수없는 <변신>을 각자가 시도할 수 있는 지혜를 가
지고 있어야 한다. 같은 밥이라도 팥밥.보리밥.밤밥.오곡밥 등의
여러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일 경우에도 역시 우리는 이별을 전제로 하고서 살
아가는 편이 낫다.
그래야만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감정이 계속 스릴과 서스
펜스 넘치게 존속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홀로서기>가 가능하
게 되어, 부부간의 끈적끈적하고 찝찝한 유착관계(癒着關係)를 방
지해 줄 수 있는 것이다.

- 마광수 저서 [성애론] 해냄 출판사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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