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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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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고생했다.


BY 둘리나라 2007-09-21

 

 


 “엄마 할매 똥 샀는갑다. 냄새난다. 빨리 온나.”

 목욕탕에서 조금 전 볼일을 봐 더럽혀진 이불을 발이 퉁퉁 불어터지도록 밟고 있던 엄마가  물기도 채 닦지 못한 발로 뛰어들어 왔다.

“아이고 금방 새 걸로 갈았는데 이기 무슨 일이고. 우짜노, 참말로 내가 미친다, 미쳐!”

 갈라진 목소리 사이로 한숨 섞인 넋두리가 방안가득 퍼지며 약간의 원망들이 먼지처럼 날아다녔다. 땀으로 여기저기 얼룩이 져버린 옷이 등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고, 이마에 맺힌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와 할머니의 이마에 ‘툭’ 신음소리를 내며 떨어져 여러 조각으로 흩어졌다.

“할마씨, 건강할 때는 내를 못 잡아묵어 힘들게 해 놓고, 병석에 누버서는 아예 작정을 하고 내를 괴롭히는 기라. 으이구, 이년의 팔자. 지지리도 복도 없제. 우찌 이리 기맥히노.”

 할머니의 몸에서 냄새 나는 옷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엄마는 연기자가 대사를 외우듯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매번 똑같은 말들을 되풀이해 댔다. 녹음테이프가 늘어나지도 않는지 숨소리 하나도 정확하게 똑같이 맞아떨어지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옷들이 할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니 주름만 가득한 깡마른 몸이 슬픈 침묵 속에서 이불 위에 버둥거렸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수분기를 잃어 가는 마른 낙엽이었다. 손에 넣어 조금 세게 쥐어 버리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부서져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겨울 들판 위의 낙엽.

 막내 손녀인 나를 너무도 귀여워해 간장에 비빈 밥을 당신이 입으로 꼭꼭 씹어 작은 내 입에 넣어 주시던 건강했던 모습은, 뇌졸증이라는 병 앞에서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숟가락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신 분이었지만, 엄마에게는 참으로 무섭고 까다롭고 별난 시어머니였다.

 중풍으로 쓰러져 마비가 오기 전까지 서슬 퍼런 칼날을 세우고, 오로지 오늘은 어떤 일로 꼬투리를 잡아 며느리 야단을 칠까만을 생각하고 사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모여 앉으면 시어머니 시집살이 이야기에 까만 밤을 다 새도 모자라고, 소설책을 쓰면 열 권도 모자라고, 눈물을 받아 모았으면 작은 샘은 안 되었겠나 하신다. 모두들 가슴에 한 가지씩은 시집살이의 아픔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가지고 산다지만 우리 엄마만큼 기가 막힌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의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말도마라. 이 집에 시집온 그날부터 내는 며느리가 아니라 식모고, 새경 안 주는 머슴이고 몸종이었던 기라.”하시며 내뱉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묻어 있음이 느껴진다.

 어른들끼리 혼사를 정하여 신랑 얼굴 한 번 못 보고 시집 온 엄마는 단 한 번도 가족들과 같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새벽 3시면 일어나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의 밥을 짓고, 자신은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누룽지 한 그릇에 지내 온 세월을 돌아보니 지금이더라 하신다. 오뉴월 뙤약볕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일하다 밭에서 낳았다는 큰언니는 그래서인지 유난히 몸이 약해 골골거렸다.

“노인네가 아들 안 낳았다고 미역국도 안 끄리 주더라. 참 독하제.”

 산후조리는 고사하고 다음 날부터 손수 기저귀 빨고 미역국 끓여 먹어 가며 밭일을 다녔다는 엄마. 지금도 그 이야기만 하면 눈물 반 서러움 반이었던 생각이 나서인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온다.

“시누였던 분이 생각만 하믄 참말로 내는 너거 할매가 밉다 아이가.”

아버지의 바로 밑의 여동생 이름은 ‘분이’였는데 약간 지능이 떨어지고 모자랐다고 한다. 동네 창피하다고 매일 방에만 가둬 두고 밥만 자꾸 먹이니 덩치가 얼마나 큰지 웬만한 장사들만 했다한다.

“시상에 그 분이를 업고 피난을 갔다 아이가. 얼매나 무거운지 하늘이 노랗더라, 참말로.”

 6.25가 나서 식구들이 피난을 가는데 할머니가 엄마에게 시누이를 업고 가라고 했다. 얼마나 무거운지 걸음을 떼기가 힘든데 할머니는 피난 보따리 하나 안 들고 봄 나비처럼 사뿐거리며 혼자 저만치 가 버렸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포성을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데 자기만 살겠다고 훌쩍 가 버리는 시어머니가 왜 안 밉겠는가! 머리에는 보따리를 이고 뚱뚱한 시누이를 업고 자식들까지 챙겨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할머니는 나 몰라라 했으니 가슴에 맺힐 만도 했을 것이다. 이 상처가 그 때 생긴 거라고 풀어 보여 주는 당신의 가슴에는 말 못한 사연들이 뭉친 실타래가 되어 그 자리에 박힌 듯, 어른손바닥만 한 흉터가 살들을 안쓰럽게 잡고 있다.

 엄마의 가슴속에는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문신처럼 박혀있고, 겉에는 시누이를 업었기에 미처 피하지 못해 총알이 빗나가면서 생긴 상처가 화상처럼 징그럽게 남아있다. 다리에는 총알이 박혀 빼낸 흉터가 움푹 패여 손가락 한 마디가 들어간다. 전쟁의 소용돌이보다 더 힘든 것이 시집살이였다니 말해서 뭐할까!

 엄마에게 있어 시어머니의 존재는 생각하면 화나고 힘 빠지고 고통만을 안겨다주는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당신이 앓아누워 며느리에게 병 수발까지 들게 하니 뭐가 그리 기분이 좋겠는가. 얼굴 볼 때마다 감정이 흔들리고, 예전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봄나물처럼 잊고 지냈던 시집살이의 밭을 비집고 올라오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씩 갈아야 하는 이부자리며 옷들, 돌아서기가 무섭게 치워야하는 방.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냄새가 나니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가면 갈수록 ‘이놈의 팔자야’ 소리는 입버릇처럼 따라다녔고 어린 나는 엄마의 팔자야 소리를 들으며 초등학교를 다녔었다.

 할머니가 쓰러지고 난 후 우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졌고, 똑같은 반찬을 두 번 올리면 날아가던 밥상이 사라졌고, 이년 저년 하던 욕도 사라졌다.

1년이 흐르고 2년이 흐르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두 분의 시간은 1979년의 봄을 경계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상하게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을 아는 걸까? 그날따라 할머니는 다른 날보다 몸도 많이 움직이고, 굳어 있던 얼굴 근육도 신기하게도 움직여졌었다. 나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였다. 엄마의 할머니를 무릎에 뉘이고 귀를 파고 있었다.

“할매 귀를 안판지 오래 됐는갑다. 귀지가 많네. 정아, 할매 다 파고 니도 파자.”

 두 분의 모습은 방 안으로 들어온 저녁노을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 값지고 소중하고 예뻤다.

“자야, 그동안 고생했다. 내가 미안하다, 참말로!”

노을 속에서 흩어지는 메아리처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몇 년 동안 말 한 마디 없으셨던 당신의 음성은 힘겨움을 담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할머니의 몸이 엄마의 무릎에서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마른 영혼은 바스러진 낙엽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무이, 어무이 .”

몇 번이나 흔들어보던 엄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목이 터져라 할머니를 불렀다. 나는 죽음 앞에 처음으로 마주 서서 삶의 이별을 보았고, 유언처럼 남겨진 마지막 한 마디 ‘미안하다’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가믄 내는 우짜라고 .어무이, 내는 우짜라고 엉 엉 엉.”

그렇게 밉다 밉다 노래를 부르더니 할머니를 땅에 묻을 때까지 엄마는 정신없이 울었다. 수의를 직접 입히고 온몸을 손수 닦아 드리며 마지막 가는 길까지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다.

 “전쟁 내내 애 먹이던 분이가 전쟁이 끝나니까 마 죽어 버린 기라. 혹덩이가 하나 없어져 시원할 줄 알았는데 우습제, 와그리 보고 싶은지 환장하겠는 기라. 사람 마음이 우찌 그리 간사하노.”

엄마는 시누이 이야기를 하며 울다가 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또 울었다.

“장날 시장가서 나일론 옷 한 벌 사왔다고 마당에 들어서는 내 머리채를 쥐어 잡고 때리다가 나중에는 막 물어뜯더라. 노인네 힘도 좋제. 내사 그리 해라 캐도 힘이 없어 못 할 낀데…….그리 밉게 했는데 우찌 이리 보고 싶노. 정말 희한타.”

시집살이 맵다 하시며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문득 두 사람은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까 생각해본다. 지독히 미워할 이유 없이 왜 그렇게 구박을 하고 트집을 잡고 때려야 했을까? 어쩌면 전생에 본마누라와 첩이었는데 다시 태어나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된 것은 아니었는지 가끔 생각한다.

 봄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간 미운 어머니를 위해 제사를 준비하는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더 많아져 버렸다. 해마다 할머니의 제사에는 좋아하는 명태를 준비하던 며느리의 등이 굽어져 손자  며느리가 대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기억 속에만 할머니를 가둬 두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어른이 되어버렸다.

 고추보다 맵다던 시집살이를 하던 며느리에게 ‘미안하다, 고생했다’ 말하고 떠나 버린 당신을 우리는 다시 봄이란 계절 속에 싹을 틔운다.

할머니의 삶을 할머니가 아니라 여자로서 보게 될 때 나는 어쩌면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엄마 역시도 시어머니가 된 지금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함은, 돌이켜보면 고생도 추억의 강 위에서는 흘러가는 작은 배임을 서서히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그러기에 더 눈물겹고 살아볼만 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따라 할머니가 먹여주는 간장에 비빈 밥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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