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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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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도서관 안녕~~


BY 개망초꽃 2007-09-19

9월의 비바람 속에 느티나무 잎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집니다.

아직 단풍도 들지 않았는데 나뭇잎 꼭지가 힘이 없어졌나 봅니다.

사과나무 도서관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을 땐 손끝 얼얼한 겨울이었는데…….

세월이 빨리빨리 흘러 흘러 와서는 아흐~ 벌써 가을이네, 말하게 되는 계절이네요.


삼개월만 다녀 보자고 말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유리문 두 개를 열고 들어온 도서관이었는데, 만기까지 채우게 되었어요.

결실 맺는 가을처럼 저도 사과처럼 양쪽 볼이 빨갛게 익었습니다.

21일까지 다니면 열매를 따야할 시기입니다.

한 알 한 알 따서 내 인생 상자 속에 차곡차곡 넣고 있는 중입니다.

사과 사이사이 쌀겨를 넣어두면 싱싱함이 오래 간다네요.

오래도록 이 곳을 간직하고 싶어서 까슬거리는 쌀겨를 인생위에 뿌리고 있답니다.


처음 온 이 곳은 익을 대로 익은 부사 달린 사과나무 한 그루가 제 마음을 설레게 했고요.

창가에 놓인 트리안 화분이 웃자라 있어서 가위로 다듬어 주었고요.

빨간 엉덩이 의자가 앙증맞았고요.

자유분방하게 꽂아 진 동화책에 눈길이 많이 갔습니다.

바닥에 놓인 시든 바이올렛 꽃잎을 따주기도 했지요.


생머리를 반반하게 빗어 질끈 동여맨 센터장님 얼굴도 떠오르고요.

눈웃음이 매력인 피 선생님도, 오는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준 유 선생님도,

서글서글한 목소리의 현 선생님도 추억 갈피 한 쪽에 끼워 있었답니다.


도서관으로 출근 도장 찍던 두 딸 아이의 엄마도, 연체료 깎아 달라던 어떤 회원님도,

책 대여하면서 고맙다고 말하던 많은 사람들…….

동생 책을 빌리러 오던 귀여운 언니도, 한국말이 서툰 일본 어느 회원님도,

꽁지머리를 땋고 다니던 두 아들의 어머니도 생각납니다.

붙임성 좋은 어떤 분은 내게 몇 살이냐고 월급이 얼마냐고 묻던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네요.


 

열어 논 창으로 비 오는 소리가 납니다.

웃자란 트리안이 있던 창가엔 이태리채송화가 놓여 있고요.

자기 멋대로 앉아 있던 동화책은 키 크기로 앉혀 놓았고요.

바닥엔 선인장 종류인 카랑코에가 색색의 꽃이 피어 있답니다.


배려 많으신 센터장님은 아들 쌍둥이를 출산했고요.

피 선생님은 여전히 잘 웃고 있답니다.

화가 나도 웃고 곤란한 일이 생겨도 웃고, 애교스럽고 친절한 웃음은 변함이 없답니다.

섭섭한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터놓고 얘기하면 잘 들어주던 유 선생님,

털털한 목소리의 현 선생님은 육아에 충실하기 위해 퇴사를 하셨고,

딸 같이 생긴 원 선생님이 새로 오셨습니다.

키도 우리 딸이랑 비슷하고 몸집도 비슷하고 동글동글한 얼굴이나 눈도 비슷하고…….

원 선생님 보면 탁구공 닮은 우리 딸이 생각나곤 했지요.


책을 빌려주고 반납 받고 정리하고 찢어진 책을 보수하면서

도서관 쪽 일이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답니다.

책과 관련된 일은 책이 무거워도 무겁지 않게 여겨지고

너덜거려 곧 분리수거 통에 넣어야 할 책도 소중하답니다.

저번엔 아빠랑 아이가 왔는데, 뭔 책을 빌려야 할지 한참을 고르시기에

강아지 책 ‘개구쟁이 해리’가 재미있더라고 권했더니 반납하시면서

참 재미있었다고 했을 때의 이 기분?

나폴나폴 떨어지는 샛노란 은행잎 비를 맞고 있는 기분이랄까?

산길을 가다 우연히 이름을 알고 있는 야생화를 만난 기분이랄까?


한 겨울에 만난 사과나무 도서관에 하얀 꽃이 피고 실록이 우거지더니

가을빛이 한 움큼 머무는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딸아이는 바다 건너 섬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아들아이는 키가 호수공원에 있는 물풀처럼 쑤욱 자라고 있답니다.

건강했던 친정엄마는 목디스크 수술을 하시고부터 부쩍 할머니 티를 내시고요.


창 밖엔 비 떠드는 소리가 나요.

도서관에 견학하러 오던 어린이집 유치원생들 같네요.

책을 가지고 와서는 “선생님 책 봐도 되나요?” 꼭 물어보던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리던 장애 여자아이가 이 순간에 왜 떠오르는 건지…….

비장애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열심히 책을 골라 내게 보여주던 아이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안녕? 아는 척을 할 겁니다.

사과나무가 있던 도서관에서 봤던 아줌마야? 생각나니? 하면서…….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왔지만

이 곳은 추억할만한 직업이었습니다.

기억이란? 힘들고 지나온 과거사를 떠올리는 것이고,

추억이란? 좋았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랍니다.

다시 말해 추억이란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자꾸 꺼내 되새김질 하고 싶은 과거일겁니다.

내가 제일 추억하고픈 날은 고등어처럼 등 푸른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날과,

이 년 전 여백의 시간이 많아 산에 마구 쏘다니던 때입니다.


몇 달 전부터 책 보수하는 일을 내 스스로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을 그만 두기 전에 깔끔하게 끝내려고 시간나는대로

한 장 한 장 책을 들춰가며 했는데,

생각보다 책이 많이 망가져서 다 끝내지 못하고 갈 것 같네요.

찢어진 책을 붙이면 책은 아흠~~이제 좀 개운하다, 하는 것 같습니다.

무생물인 책이야 감정이 없겠지만 서두 제 마음이 개운한 거겠지요.

삼일 남은 시간 동안 부리나케 땜질을 할 겁니다.

땜질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지요.

유아용 책이지만 작품성 있고 웃음이 흘러나오고 감동을 주는 책이 많았어요.

그림도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귀여운 동물그림에 반해 몇 번씩 읽은 책도 있고,

바닷가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여자는 주변에 꽃씨를 뿌리고 다녔더니

바닷가 마을이 꽃마을이 되었다는 내용에

나도 오 년 뒤 시골 가서 살면 꽃씨를 뿌려 꽃동네로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답니다.

산골 소년이 누나를 떠나보내고 산에 대고 누나아아~~ 부를 때는,

일본으로 유학 떠난 누나를 그리워하던 아들아이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슬쩍 스며 나오기도 했답니다.


센터장님? 편안하게 해 주셔서 추억에 남을 일터였습니다. 쌍둥이랑 행복하시와요~~

피선생님의 미소, 나도 닮고 싶은 미소였습니다.

원선생님은 결혼하셔서 알뜰하게 살림 잘 하실 것 같아요.

다정다감한 유 선생님 고마웠어요. 좋은날들이 많길 바래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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