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 공부가 싫었다.
물론 집안이 가난해서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장학생으로 공부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니 가난만이 학업을 중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서울에 가서 양복점 시다 양장점 시다 포목점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조금씩 철이 들었다.
그래도 공부가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부살이를 하던 작은집에선 작은어머니와 작은아버지 사이에 의견이 달랐다.
작은어머니야 당연히 내 귀향을 환영 또 환영이었지만 작은아버지는 내가 집으로 가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불편할 것이고 그로 인해 집안에 분란이 일거라고 반대하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강력한 무기인 단식을 시작했다.
사흘을 굶고 누워있는 내게 작은아버지도 손을 들었다.
\"그래, 보내 줄테니 일어나 밥 먹어라.\"
집으로 돌아 와 고등공민학교에 가서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들 반대하였다.
정규 중학교에서 퇴학 당한 아이들이 다니는, 건전한 아이들도 문제아로 만드는 학교, 그것이 울부모와 큰언니가 고등공민학교에 대해 알아낸 정보였던 것이다.
다시 굶고 누웠다.
결국 사흘이 못 가 아버지가 항복했다.
\"나는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발딱 일어나 면사무소로, 다녔던 초등학교로, 서류를 하러 다녔다.
교복이 필요하다는 고등공민학교 입학 담당선생님하고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저는 교복 살 돈 같은 것은 없는데요...\"
\"그럼, 뭘 입고 다닐테냐?\"
\"지금 입고 있는 옷 밖에 없어요.\"
가난한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도 나처럼 황당한 경우는 날마다 겪는 일은 아니었던지 그 선생님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래,... 그럼 교복 살 돈이 생길 때까지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입고 다녀라.\"
교복만 보면 어느학교 학생인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던 조그만 소도시에서 나는 그 전에 다니던 학교 교복을 입고 다시 학생이 되었다.
언니가 알아 낸 정보대로 정규 중학교에서 퇴학당한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고 그들의 눈에 난 좋은 놀림거리였다.
신이 나서 놀려대는 남학생들 사이로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당당한 표정으로 걸으며 그들을 무시했다.
\'미친 놈들, 내가 교복 자랑하러 온 줄 아냐.... 공부하러 왔지.\'
일 년 뒤,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 아버지는 경사를 맞았다.
두 딸이 차례로 신문에 났으니까...
하나는 예비고사 성적 우수자로, 하나는 검정고시 합격자로...
참 그 때는 검정고시 합격이 고등고시 합격 만큼이나 어렸웠나보다.
검정고시 합격했다고 신문에 사진을 실어주었으니...ㅎㅎㅎ
일류여자고등학교 합격은 당연히 이어지는 일이었고...
일류여고의 상징이던 백선이 달린 교복을 입고 다니는 날 보고 뒷집 아저씨가 그랬다.
\"저 자식은 제 고집 때문에 앞으로 크게 될거라니까...\"
야트막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던 뒷집 아저씨는 내가 굶고 누워 있을 때 담장너머로 날 달래기도 했었는데...
살아 생전 어머니는 나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
어머니가 하는 인생에 대한 충고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언제나 제멋대로 였으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생각하는 난 말썽꾸러기인줄 만 알았었는데...
울엄마 세상 떠나고 이십년이 가까워진 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형님, 어머니가 날더러 그러시더라구요... \'너 두고 봐라. 우리 막내딸이 나중에 크게 될 것이다.\' 그 때 어머니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대학에서 교수하는 박사 학위 가진 둘째딸을 제껴두고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막내딸이 크게 될 거라고 하는데 우습잖아요.\"
올케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십 여 년 전, 올케가 갓 시집 온 새댁이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란다.
\'울엄마가 날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나에 대한 걱정으로 항상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사는 줄만 알았는데...
큰언니가 여러가지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아들 둘을 사고로 잃고 형부는 사십초반에 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막내 같으면 이런 일이 있어도 걱정을 덜 하겠는데 큰 애는 마음이 여려서...
막내 그것은 산꼭대기에 버려도 살아날 놈인데...\"
울아버지가 그랬단다.
당신 고집도 대단한데 막내딸 고집에는 두 손 들었다고 눈물을 흘리던 울아버진데...
지금 울남편이 힘들어한다.
아내인 내 고집 때문에...
그런데 남편이 아무리 힘들어해도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멈출 수가 없다.
타고난 고집쟁이라서인가...
언젠가 남편도 울부모처럼, 뒷집 아저씨처럼 날 믿어 줄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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