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서울 한복판에서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대문이 세 개나 달린 종로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편의 집엔 일하는 사람과 가난한 친척들이 가족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시아버님은 주유소와 쌀 상회를 하셨는데, 쌀 한 가마니와 분유와 바꿔치기를 해서 남편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분유를 많이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형제들은 키가 작고 몸이 약한 편인 반면 산골짜기에서 눈칫밥만 먹고 자란 우리 형제는 키도 키고 건강한 편이다.
나는 과일 노점상 딸이라서 남거나 썩은걸 도려내고 먹었는데, 남편은 갖가지 과일을 상자채 쟁여 놓고 먹었고 쇠고기국만 사시사철 훌훌 먹고 자라서 된장국을 싫어했다.
가난이 뭔지 모르는 남편은 돈이 뭔지도 몰랐다. 만원이 모여 십만 원이 되고 십만 원이 모여 백만 원이 된다는 본능적인 계산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먹고 사는데 왜 돈이 필요한지 조차 몰랐다. 저축을 해야 한다고 하면 왜 하는데? 하고 도리어 반분했다. 어릴 적에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엿장수가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엿이 먹고 싶어서 그 자리에서 자전거로 바꿔 먹었지, 하면서 태연하게 말하던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한 달에 생활비 백만 원을 갖다 주던 사람이 하룻밤 술값이 오십만 원이 나왔다고 이웃 사람들에게 헬헬헬 웃으면서 말하던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누가 집을 샀다고 하면 집이 왜 필요한데?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밤새 놀다가 새벽에 들어와서는 내게 카드를 주면서 백화점 가서 사고 싶은 거 사? 하던 좁쌀 영감탱이가 아니고 통 큰 사내대장부였던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그렇게 카드를 남용하더니 결국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집도 없이 떠돌게 된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다섯 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남편은 심성은 착한 사람이었다. 주변에 헐벗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던 사람이었고, 내 입으로 음식 들어오는 것보다는 옆에 사람들 입에 음식 넣어 주는 걸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내 마누라보다는 친구 마누라 시중을 들고 갖은 비위를 맞추던 사람. 남편 친구들이랑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면 나는 뻘쭘하게 있다가 뻘쭘하게 돌아와 뻘쭘하게 남편을 쳐다보면 왜 쳐다보는지 몰랐던 착하다 못해 뇌세포가 좀 모자란 듯한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쌀과 기름이 넘쳐나던 부잣집에서 태어난 남편은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겨운지 계산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잘못된 게 아니고 부자 부모님을 갖고 태어난 게 잘못이었다고 본다.
시아버님은 남편이 중학생이었을 때 재산을 많이 남겨 놓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남편 집에 처음으로 인사를 하러 갔을 때는 자그마한 시어머님과 작달막한 두 누나가 안방에 앉아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파란 철대문에 양옆으로 라일락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라일락꽃 향기의 기억이 없으니 아마도 봄이 지나고 여름이 한바구니 정원에 널려 있던 계절이었나 보다.
정원엔 잔디가 곱게 깔려 있었고, 잔디밭 사이로 돌길이 놓여 있었다. 잔디밭 가장자리로 펌프가 있는 우물이 있었다. 서울한복판에 우물이 있고 녹슨 펌프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의아했고 의심스러웠다.
안방엔 세 여자가 같은 크기로 앉아 있었다. 시어머님이 세 분인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갔다가 훌떡 올라왔다.
“우리 집이 돈이 많은 줄 알고 만나는 거라면 생각을 다시 하도록 하세요.” 그건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었고 큰 누님이 하신 말이었다.
“얘는 돈만 쓸 줄 아는 철없이 애라는 거 알고 있지요?”
이것 또한 큰 누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정원이 딸린 주택 일층 안방에도 햇빛이 한소쿠리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장판에 깔린 햇빛만 주시하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옆에서 쭝얼쭝얼 궁시렁궁시렁 한 것 같은데 꿈결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난이라는 때가 덕지덕지 묻은 왕십리 골목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내가 가난하다는 건 이미 남편 집에서 알고 있다. 가난하니까 돈만 보고 남편에게 접근하고 결혼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난이 지겨워 가난한 사람은 싫었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머릿속에 넣고 다닌 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그렇게 물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부자기 때문에 당당한건지 가난한 내가 들어 와 시집 재산을 빼앗을까봐 그런 염려증에 걸려 있는 건지…….부자라는 사람들은 다 그런가?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도 없는 줄 아나보다. 그래 나 가난하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 옆에 붙어서 잘 살면 안 되겠냐? 좀 나줘 가지면 어디가 덧나냐고? 왕십리 골목은 음습한 냄새가 났다. 가난이라는 냄새는 질기고 끈덕지고 끈적하고 텁텁하다.
결혼은 안 될 줄 알았다. 싫다고 했다. 가난도 불편하고 서러운데 그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을 애틋하게 사랑한 것도 아니고, 재산만 바라보고 결혼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만 만나자고 했다.
결혼의 인연은 따로 있다고 했다. 사랑 하나만 가지고 결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선을 보고 몇 번 만나다가 결혼하는 사람도 많았다. 때가 되었으니까 결혼하는 사람도 많았던 80년대, 여자도 남자가 뭔지 몰랐고 키스만 해도 결혼해야하는 줄 알았다. 남자도 여자가 뭔지 몰랐고 손한번 잡는대도 시간이 엄청 필요했던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사랑은 무슨…….개 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우리 집 개는 들판에서 냅다 뛰는 걸 좋아한다. 냅다 뛰어다니다가 풀을 뜯어 먹었다. 봄엔 쇠뜨기를 뜯어 먹더니 여름엔 개망초 잎을 뜯어 먹었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는 어이없는 소리에만 붙이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개는 풀을 뜯어 먹는다. 그것도 맛있는 소리를 내며 말이다.
결혼할 때까지 사랑을 해 보지 못했다.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마음이 뭐에다 쓰는 마음인지 몰랐다. 그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감정인줄 알았다. 나는 손발이 찬 냉혈인간이라서 사랑이란 감정을 못 갖고 태어난 줄 알았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나이가 차서, 같은 회사에서 책상을 마주보고 있다가 친해서, 직장이 화이트칼라라서, 시집이 부자라서, 막내아들이라 편할 것 같아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결혼이 평탄하다고 해서,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서, 성격이 명랑해서, 말수가 많아서, 나와 반대인 사람이라서 결혼을 했다.
애틋한 감정은 없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풍성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이었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집 맏딸이 삐까번쩍한 부잣집 막내아들에게 시집간다는 드라마 속에나 나옴직한 결혼이었다.
드라마가 아닌 실화였었다. 나의 결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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