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진 병마와 씨름을 하다가 한판에 나가 떨어지셨다.
그 때 엄마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었고
나는 여덟 살, 큰 동생은 여섯 살, 막내 동생은 두 살이었다.
강원도 산골은 엄마의 고향이면서 내 고향이기도 하다.
아버진 직업군인으로 계시다가 제대를 하시고 대구에서 문구점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엄마의 고향으로 올라오셨다.
고칠 수 없는 만성신장염을 앞세우고, 젊디젊은 마누라를 옆에 끼고,
고만고만한 철부지 아이들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리며
산 고갯길을 넘을 때의 심정은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몇 달 후 한여름의 높은 기온이 온 몸에 훅 끼얹던 날
동생과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 먹고 있을 때
오디처럼 까맣게 된 얼굴로 큰 이모가 달려오시더니 얼른 내려와라 돌아가셨단다, 하셨다.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라는 것을 서로 말하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다.
어머닌 꽃상여에 매달려 산골마을을 뒤흔들며 으아악 하며 울 때,
큰 동생은 제사상에 올려진 무지개 빛 사탕을 달라고 울었다.
막내 동생은 아장아장 걷던 애기라서 엄마를 찾으며 울었고,
맏딸이었던 난 그래도 뭔가를 느끼는 초등학교 일학년이라서
엄마를 따라 눈물을 질질 흘렸다.
나는 병마와 씨름을 하던 아버지가 무서웠었다.
한약을 먹다가 익모초 즙처럼 쓴 인상을 쓰며 약사발을 마당으로 획 집어 던지던 모습과
날이 갈수록 일그러질 때로 일그러지고,
짜부러질 때로 짜부러 들고 있는 아버지 얼굴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 모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다음 해 우리 가족은 네 갈래 길에서 흩어지게 되었다.
서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지 못하고, 눈물로 인사를 하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엄마는 앉아 있어도 코를 베어 간다는 서울로 가시며 돈 많이 벌어서 같이 살자 시며,
눈이 뎅그렁한 큰 동생은 강원도 외갓집에 맡겨 놓았고,
막내 동생은 큰 이모가 자식처럼 키워 준다고 해서
남의 집 자식으로 보내려고 예약을 해 놨다가
운명이 바뀌어 큰이모네 막내아들이 되기로 했다.
나는 동두천 작은집에서 살모사 같이 생긴 작은 엄마 그늘에서 살게 되었다.
그렇게 네 식구는 각자에게 맡겨진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며 날이 가고 해가 지고
다시 봄이 오는가 싶으면 어느 사이 문 밖엔 흰눈이 풀럭풀럭 떨어졌다.
어느 날은 큰 동생과 함께 동두천에서 작은 엄마한테 구박을 쥐어 박히며 살고,
어느 해 늦봄엔 외갓집에서 소쿠리 옆에 차고 이모들과 산에 올라 뽕잎을 따고,
어느 겨울엔 뒹골 큰이모네에서 막내 동생과 가마솥에서 찐 술 냄새 나는 찐빵을
아구아구 먹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네 식구는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 졌다가 둘씩 셋씩 모여 살기도 했지만
네 식구가 다 모여서 살기까지 팔년이란 세월이 흘러야했다.
이렇게 모여 살 수 없는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병마와 씨름을 한 아버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한꺼번에 패대기쳐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영혼이 떠난 아버지를 산속 흙구덩이에 꼭꼭 밟던 그 시절엔
우물가에 보리쌀을 씻던 금순이도, 도랑에서 빨래를 하던 연희도,
밭에서 잡초를 뽑던 순분이도 서울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에
보리쌀 바가지며, 빨래 함지며, 호미자루를 내 던지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가던 때였다.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 없는 아이 셋을 굶기지 않고 학교를 보내려면
서울로 가는 완행기차를 타고 식모살이부터 돈 벌이를 시작해야 했다.
큰 동생은 외할머니 댁에서 외삼촌 식구들과
한 상에서 눈치 밥을 먹고 한 방 윗목에서 잠을 자며
밤이면 밤마다 눈크기만큼 눈물방울도 왕방울만 했을 것이다.
애기였던 막내 동생은 큰이모의 사랑 품에 성큼성큼 잘도 자라고 있었는데,
큰 이모는 대문 앞에 심어 놓았던 푸른 보라색 무궁화 꽃이
화들짝 화들짝 호들갑스럽게 필 때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부터 막내 동생은 천덕꾸러기로 자라야했다.
큰이모를 모시고 살던 큰아들 마누라의 구박은
내가 작은엄마한테 받았던 서러움만큼 깊고도 길고도 험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린 심성이 착해서 그런지 아니면 마음이 약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빨리 어른 마음이 되어서 그런지
가끔씩 엄마를 만나도 왜 여기다 놔두고 갖은 구박을 받게 하냐고 땡강도 부리지 못했고,
엄마랑 같이 서울로 가겠다고 땅바닥에 앉아 다리를 바동거리며 울고불고 하지 않았다.
우리 넷은 가마솥처럼 진득하게 잘 참아내서 뜸이 들을 만큼 들은 다음
드디어 엄마가 해 준 뜨끈한 밥을 양은 상에 동그랗게 모여 편히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가 내가 중학교 삼학년이었다.
그곳은 서울이었고 똥파리가 득시글거린다는 왕십리였다.
엄마는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어찌어찌 왕십리 시장 통으로 들어와 노점을 했다.
여름엔 미숫가루 냉차 장사를 했고, 겨울엔 호떡을 노릇노릇 구웠고,
가을엔 구수한 감자를 쪄서 팔았고,
봄엔 파득파득 높이뛰기를 하는 생새우를 팔았다.
시장가 불도 때지 못하는 월세 방 한 칸에서
우리는 몸뚱이 작고 빈약한 엄마 닭 품에서 병아리처럼 살아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술 팔고 몸 파는 장사만 빼고 안 해 본 장사 없이 다 했지만
키 작은 쌀 항아리는 연실 비어 있었고, 일수 돈을 내어 자식들 학비를 내야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살모사 눈으로 날 쳐다보던 작은엄마 그늘에 벗어나서 좋았고,
엄마를 매일 볼 수 있어 좋았고, 동생들이 옆에 있어서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
밤마다 그 약한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도를 하시다가
나중엔 엎드려 눈물로 기도를 하시던 엄마,
내 말을 잘 듣던 왕방울 큰 동생은 공부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공부를 아주 잘했고,
두 눈이 쫘악 찍어진 고집쟁이였던 막내동생은 가족한테 만큼은 착하고 착했다.
우리 남매는 서로 더 먹겠다고 싸운 적도 없었고, 엄마한테 대들지도 않았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봄날의 잡초처럼 쑥쑥 길쭉길쭉 잘도 자랐다.
그렇게 힘들게 자식 셋을 홀로 길렀으면서도
욕 한번 한 적도 없었고 힘들다고 못살겠다고 겉으로 표시내지 않으셨던 나의 어머닌
언제나 어미닭처럼 우릴 품어 주셨다.
엄마랑 같이 살았지만 가난은 좀처럼 벗어나지 못 해 빗물 새는 둥지였지만
엄마의 안전한 날개 죽지 안에서 옆구리만 살짝 젖으며 별 탈 없이 어른이 되었다.
큰 동생은 폭풍이 쏟아 져도 나라만 떠내려가지 않으면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다는 공무원이 되어
엄마를 모시고 일산신도시에서 살고 있고,
남의 집 아들이 될 뻔한 막내 동생은 유명한 병원 관리 과장이랍시고
매일 전화를 해서 엄마, 우리 엄마, 어디 아픈데 없으세요? 종합검사 또 받아 볼까요?
다정한 효도 아들이 되어있다.
나는 어릴 적에 떨어져 산 게 한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은 엄마와 같은 마을에 붙어살면서 매일 엄마를 귀찮게 하고 있다.
우리 네 식구는 자주 만나 옛이야기를 하며 와하하 뒤집어지게 웃는다.
너는 누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면 똥바가지를 흔들어 대서
그때부터 별명이 똥바가지였어.
고등학교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겠다고 쫒아오는거야, 가난한 우리집을 보여주기 싫어서
왕십리 골목을 몇시간동안 빙글빙글 돌기만 했더니 지쳐서들 그냥 갔었지.
사춘기땐 호떡 장사를 하던 엄마가 창피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엄마가 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워.
잡초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우리가 잘 자라 푸르른 나무처럼 된 것은
어머니 홀로 온 몸을 불태운 희생 덕분이고,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된 형제가 있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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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서 백일장이 열렸습니다.
이 글이 그때 쓴 글입니다.
무슨 상이면 어떴습니까...
글 쓰는 게 좋아서 글 쓸때가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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