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풀잎처럼 바짝 마른 녹차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복사꽃잎 날리는 도자기 찻잔에 담고,
한소끔 식힌 뜨거운 물을 부어 놓는다.
오 분쯤 지나면 마른풀은 나무에서 잎이 돋아나듯 파릇파릇 살아난다.
뜨거움을 식히며 한 모금씩 마시면
풋풋한 향이 입안 가득 스민다.
어쩌다 연녹빛 차 물에 딸려온 녹차 잎을 잘근잘근 입으면
쌉쓰름한 자연의 맛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문 밖엔 멀리 산이 걸리고,
꽃과 나무가 풍경이 되는 뜰,
풀냄새 나는 바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지만
차 한 모금에 산이 보이고, 꽃이 흔들리고, 바람 냄새가 실내가득 들어온다.
수제차를 선물 받았다.
첫 잎 작설차였다.
첫 자가 붙은 건 무엇이든 설레고, 순수해 보인다.
첫직장, 첫 만남, 첫눈, 첫 여행지.
티백으로 된 녹차를 마시다가
차 잎이 살아나는 차를 마시니 도시 빌딩 숲을 벗어나 산 숲 어느 집에 머문 것 같다.
한 모금을 마시며 그리운 사람을 떠올린다.
두 모금 마시면 보고픔이 밀려든다.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물면
자칫 지루하고 무기력한 나를 깨우게 된다.
이틀 동안 집안에 나를 놓게 되었다.
산에도 가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볼일도 보지 않았다.
전화기도 꺼 두었다.
집 전화도 받지 않았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녹차를 한 잔 마셨다.
이 년 전 내 모습이 집안에 그대로 있었다.
몸을 놓고 나니 무엇 하나 걸리는 게 없었다.
마자, 그때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어,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까? 앞날이 어두웠었어.
지금의 나는 걸어갈 길을 정해 놓고 갈등하고 흔들리고 있잖아.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꽃이 피어나겠어.
혹독한 겨울에 맞서며 나무는 오로지 한곳에 우뚝 서 있잖아.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출발금 삼백만원을 받아서 스스로 사회인이 되어야 한다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삼백만원은 한사람의 생명 줄과 같은 돈이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방 한 칸을 얻어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한다.
어떤 이는 사막위에 홀로 걷는 떠돌이가 되고 어떤 이는 바위위에 가정을 짓게 된다.
그들의 쓸쓸함과 막막함을 보며 나를 위로 받았다.
남의 가난이 나를 부자로 만들고
남의 불행을 보며 내 스스로 위로를 받게 된다.
내가 빈곤한 게 아니고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게 된다.
보고싶은 티비 프로그램을 실컷 보았다.
대부분 나를 비울 수 있는 오락프로나, 상대적 빈곤을 느낄수 없는 프로그램만 찾아 보았다.
이틀 동안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남아돌았다.
주식인 밥에 연연하지 않고, 먹고 싶은 걸 먹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녹차를 마시며 시를 음미했다.
다 바람 같은 거야 -묵연스님-
다 바람 같은 거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야
가을바람 불어 곱게 물든 잎들을 떨어뜨리듯
덧없는 바람 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일 뿐인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하리
결국 잡히지 않는 게 삶인 걸
애써 무얼 집착하리
다 바람인 거야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가는 게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