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은 식구들 밥상 차리다 보면 하루가 다 가버리는데, 지난 일요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밥과 국을 해서 느지막이 아침을 먹자마자 곧 점심때가 되어 김치볶음밥을 만들었고 그다음은 간식으로 만두까지 쪄야 했다. 그러는 틈틈이 빨래와 집안일까지 하다 보니 오후에는 그만 내 몸이 녹초가 돼 버렸다. 도저히 저녁준비까지 할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늦은 점심에 만두까지 든든히 먹었으니 그럭저럭 저녁밥은 생략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 8시가 되도록 텔레비전만 보며 누워 있었다.
제일 먼저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 사람은 일곱 살 작은놈이었다. 그러자 남편과 큰애도 왜 내가 밥 줄 생각도 않고 늘어져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먹고 또 먹잔 말이지, 난 배신감을 느꼈지만 주방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있는 밥에 뚝딱뚝딱 부대찌개 하나 만들어 상을 차렸다. 그랬더니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숟가락 놀리기 바빴다. 정말 내가 미안할 정도로 남편과 아이들은 저녁을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찬이라곤 달랑 찌개 하나뿐인데도. 나는 문득 이 장면이 꽤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기억은 쏜살같이 이십여 년 전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나는 왁자지껄한 시장 길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내 손에는 과일 몇 알이 든 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날 작은아버지께 내가 직장에 들어가려면 꼭 필요한 신원보증을 부탁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 용무만 아니라면 일 년 가야 명절 때나 한두 번 얼굴 볼 뿐인 작은아버지 댁에 내가 직접 갈 일은 거의 없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작은아버지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나는 풀이 잔뜩 죽어 있었다. 물론 작은아버지가 그 청을 안 들어줄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빚쟁이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드디어 시장 한복판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상가건물을 소유한 작은아버지는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축에 들었다. 문패를 꼼꼼히 확인한 뒤 나는 2층 살림집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할 수만 있다면 발길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현관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벨을 누르기도 전에 나는 작은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계단 옆으로 나 있는 거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작은집 식구들은 상 앞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나는 그만 불청객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문을 열어준 작은어머니가 내 손을 잡아끌어 상 앞에 앉힐 때까지도 당황하고 있었다. 머리는 저녁까지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시키는데도 손은 작은어머니가 내미는 숟가락을 받아들고 있었으니.
작은어머니는 그냥 있는 대로 먹자며 밥솥에서 찬밥 한 공기를 떠 오셨다. 그런데 나는 밥상을 보고 좀 놀랐다. 둥근 상에는 국자가 걸쳐진 커다란 찌개 냄비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다른 반찬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퍼먹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잘 사니까 먹는 게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 단출한 저녁상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궁전에 초대돼 성찬을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시끌벅적 얘기를 나누며 후루룩 쩝쩝 밥을 먹던 그 자유롭고 화목한 분위기에 나는 쏙 빠져들었던 것이다. 작은아버지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자주 보지 못해 서먹할 줄 알았던 그 사촌들과도 뜻밖에 얘기가 잘 통해서, 용건이 끝나고도 나는 두 시간 정도를 더 놀다가 그 집에서 나왔다. 사촌들이 계단까지 나와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집까지는 몇 정거장을 가야 했는데, 나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얻은 훈훈한 감정을 곱씹으며 버스도 타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그건 참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때까지 난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 먹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따뜻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의 저녁시간은 늘 공포 그 자체였다. 언제쯤 저 골목 끝에서 아버지의 술주정이 들려오나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술에 떡이 된 아버지가 돌아와 엄마와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잠에 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하루가 끝이 났다. 그런 우리 집에서 평화로운 저녁식사를 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 가지 소원을 갖게 되었다. 나도 나중에 저런 가정을 이루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며 살고 싶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이미 꿈을 이룬 셈이다. 찌개 하나에도 머리 맞대며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이 있으므로. 그러자 밥하기 싫다고 꾀나 부렸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잠시 후 나는 씩씩하게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