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창업박람회 65세 이상 관람객 단독 입장 제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90

홀가분히 돌아오는 길


BY 루나 2007-03-08

늦은 오후, 켄베라 시내를 막 벗어날 무렵  빗방울이 차장에 부딪기 시작하였다.구름한점 없이 더운 날이여 폭풍이 올거라한  일기예보를 전혀 무시하였는데  어디서 몰려왔는지 순식간에 하늘은 짙은회색 구름으로 덮히고 있었다.  좀더 일찍 떠날수도 있었는데 삼춘집에서 점심을 먹은  딸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 차마 깨울수가 없었다.  짐싸랴.. 청소하라.. 아마도 밤을 꼬박새운 모양이였다. 

얼마전  마지막 시험을 끝낸후 기숙사에서 나와야 하여 선배언니의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때 대강 버릴걱을 정리하였고  몇박스의 짐이 이미  집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삼춘차와 우리차에 나누어 실고 올수가 있었다.

 

켄베라(Canberra),  호주의 수도이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아름다운 건물의 정부청사가 있고  전쟁박물관, 그리고 각 나라의 대사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몇 몇 나라는 자기 나라의 특유한 건물 양식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엿볼수 있게 지어져 있기도 했다.  또한 정부기관들이 모여있어 공무원이 많은  곳이다.  마치 수풀속에 도시가 있는 듯이 나무가 많아 아름답고 상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름이면 다른 도시보다 온도가 더욱 높이 올라가고  겨울이면 눈이 내릴정도로  춥기도 한곳이다.   

이민 초창기에는 한국분들이 도토리를 줏어 가루로 만들어 두었다가 먹기도 하고 서울로 보내기도 하는  바람에 이곳까지 도토리를 줏으려 올만큼 이곳엔 상수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이민 역사가 해를 더하여 가면서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그때는 소중한  일과의 소일거리가 될수 있었음일게다. 

봄으로 들면 이곳에선 튜울립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나도 몇년전 봄방학때 처음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본적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디 넓은  공간에 종류별로 각각 다른 색갈을 띄고 심겨져 있는 것에  튜율립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놀람을 금할수  없었다.

4년전 오늘  무척이나 더웠던날,  처음으로 딸아이들 데리고 오던 때가 생각난다.

문학을 전공하여 극작가가 되고 싶어 하였던 아이는 학위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받고 싶다며 그 학교로  진학할수 있는 가장 쉬운 호주 네셔날 대학을 택하였다. 시드니에도 대학이 여럿있는데 궂이 집떠나 이곳으로 오겠다는 아이를 말릴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남편도 나도 마찬가지로 석연치가 않았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띨아이를  데려다 주면서 복수전공이니 5, 앞으로 9번을 더 왔다 갔다 할일이 참 암담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하여보지 않은 빨래며. 음식을 재대로 하여 먹기나 할지?  쉽지 않은 공부를 잘 해낼련지도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지방에서 온 새련되지 않은  아이들이 하나씩 도착하여 짐을 옮기고 있었다. 방은 누가 닭장만 하다 하였지만 침대, 책상, 책꽂이, 옷장, 세면대 갖출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작은 빈 공간이 있어 냉장고를 하나 사서 넣어 주고 왔다.

학교를 돌아보면서 우리를  당혹하게 한것은  남녀가 함께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한다는 것이였다. 어쩌면 그것이 더 자유스러울수도 있을텐데 그땐 참으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부엌은 넓디 넓은 곳에 몇명이 함께 사용하는 냉장고와 요리대 그리고 그 아래 열쇠로 채우게 되어있는 찬장이  마치 소꼽놀이 전시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학년이 끝나는 12월이면  일단은 기숙사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짐을 챙겨  집으로 데려오고  학기가 시작하기 전 2월이면  다시 짐을 실고 데려다 주어야 했다. 삼춘네와 학교 창고에 작은 공간을  배당받을수 있어 불어나는 짐들을  조금씩 맡길수가 있었다.

또한 이곳은 아이들이 따로 나가살면 정부에서 지불하는 보조금을 당연히 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신청하여 보니  부모님들의 수입에 따라 상황이 달라 우리는 전혀 해택을 받을수 없었다. 부모에게 부담주지 않고 자립하겠다고 자신만만 했던  딸아이는 심적 부담이 컸는지 아라바이트 자리를 구하려 하였으나 그도 쉽지 않았다. 켄베라는 적은 도시여서 일자리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였다. 다행히 잠깐씩 학교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였으나  학기가 바뀌면 시간이 달라져  할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것에도 많이 힘들어 하였다. 문학만 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법을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첫학기, 두번째 학기엔  한과목씩 다시 재시험을 치루어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했다.  대학들어가 첫해가 가장 어렵다고 한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듯 하였다.

다른 대학은 1,2점이 모자라면  출석일수나 다른 것을 참작하여 올려 주기도 한다는데 그곳은 여지 없이 재시험을 치루어야 했다.

 

3학년이 되어서야 이민국에 운좋게 취직이 되었다. 학생은 받지 않았는데 예외없이 한 자리를 만들어 한주일에 이틀  일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시험때가 오면 빠져야 했고  대신 오전수업만 있을때나 토요일에 기간을 메꾸며 일을 하여야 했다. 이민법을 만드는 곳이여서 그 과목에선 좀더 흥미를 갖게되어   좋은 성적을 받기도 하고 직장의 3개나 있는 도서실을 마음대로 이용할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는것 같아 정말 다행이였다. 공부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처음 계획과는 달리 문학은 필요한 과목들만 이수한후  일단 중단하고 법을 먼저 끝내기로 하였다.  마지막 시험을 치루고는 바로 난민법을 만드는 곳에서 풀타임으로 일을하였다.  그 학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인터네셔넬 학생이 많은데 그 무렵 다들 돌아가니 딸아이도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직장만 다니려고는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고 다시 그곳에서의 겨울을 지내기는 몸서리치게  싫다고 시드니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시드니로 돌아와 한 두어달 일을 하고 경비를 벌어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 생각엔 이왕 일을 할것이니 한 일년정도 경험을 얻는것이 좋기도 하겠다 생각이 슬쩍 스치기도 하였지만  나름대로 심사숙고한후에 내린 결정일테고 일단 집으로 온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4,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힘들었든 시간은  몇날을 몸져누워 침대에서 잠만 자느라 전화 연락이 되지 않아  마음 조렸을 때다.  연락이 되어 집으로 데리고 와 몇날을 쉬며 다 나아 보내기는 하였으나 어쩌다 연락이 안될때면 또 아픈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거의 매일 파스타만 먹는다 하던 아이가 가끔 집에오면 오면 김치부터 시작하여 여러 메뉴를 밤늦도록 들락날락하면서 먹고 얼굴이 퉁퉁붓도록 늦게까지 잠만자다가 가는 것을 보는것 또한 안스러운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 학교입구의 높다란 고목에 하얀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꽃 알레르기로 학생전체가 한차례씩 요란스럽게 앓기도 하고 누구하나 감기로 앓기 시작하면 공간이 좁은 탓에 기숙사 학생 모두가  함께 앓는다고 하였다. 매주 때로는 몇번이나  통화하는 내용중엔  친구들과 커피 마시고 있어” “영화를 보려고 해등 밝은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약 값을 보내줘”.”먹을것이 하나도 없어”” 학교차가 수퍼에 가는데 돈이 없다등의 기운 없는 소리는 항상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  

인터넷으로 송금을 할수 있어 언제라도 전화만 오면 바로 보내고 또 바로 ㅤㅊㅏㅊ아 쓸수가 있는것이 정말  다행이였다. 

떨어져 있어 항상 마음쓰고 있는 우리보다도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며 지낸 딸아이도 결코 쉬운 생활을 아니였겠지만  그러나 그 모두가 앞으로의 살아감는 삶속에서  산 경험이 될것이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번개가 섬찍하게  번득거리고  천둥소리가  요란한데도 아이는 여전히 정신없이 자고 있다. 이제는 또 다른 환경에서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데, 적응하노라면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격기도 할것이다.  

집에 있는 동안 정말 편안히 잘 지낼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고 잘 해주어야겠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튈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함께 있게 된것만도 얼마나 감사한가..  한 과정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할 뿐이다.

오랜 가뭄으로 누렇게 마른땅에 뒹군 양들이 회색빛을 띄고 군데군데 떼지어 마치 바위처럼 서있다.  비가 몇날 몇일 왔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이길을 달릴때는 제 색갈을 한 하얀 양들이  푸른 초원위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따라 시드니와 켄베라가 퍽이나 멀게 느껴진다.

다시 짐실고 아이데리고 이길을 오지 않아도 되는, 부담감이 사라졌음에 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