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굳이 주량을 들먹이자면 맥주 한잔이 고작이지만 어느 좌석에서든 술 못 마신다는 소리는 입버릇처럼 달면서도 엉덩이 들이민다.
애주가인 아버님과는 달리 하다못해 막걸리 한잔도 입에 넣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닮은 탓이지만 구구한 설명 보다는 체질에 안 맞는다고 둘러 대는 게 제일 간단한 해명이다.
술 못 마시는 나에게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 ‘술 등신’이다.
이렇게 자존심 긁는 별명을 지어준 내막엔 술 마시는 사람 기분 이해 못해 준다는 섭섭함과 타박이 깔려 있다는 걸 모를 내가 아니다.
그래서 두 눈 딱 감고 시도 한 번 했다가 목구멍이 뚫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맛 본 이후론 술 주(酒)자만 들어도 어지럼증이 재발하곤 했다.
맥주는 술이 아니고 음료수라고 하면서 소주를 건네기에 꾀 없이 단숨에 홀짝 마셔 버렸으니 ‘술 등신’으로서는 뒷감당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술 못 마시는 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술 한 잔’ 하자는 유혹을 받으면 결코 거절 하지 않고 쪼르르 나가서 2,3차까지 버텨주는 저력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술잔이 비어 있어도 채워 줄줄도 모르고 한잔 건네면서 분위기 돋울 줄도 모르는 등신이지만 그렇다고 한쪽 귀퉁이에 앉아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행세는 하지 않는다.
술 마신 사람 못지않게 대화에 섞여주고 동참의 의미로 안주는 부지런히 축을 내준다.
혹자는 내숭 떠는 줄 알고 끈질기게 술잔 들이대다가 안 되면 입에다가 쏟아 붓는 시늉으로 기어이 실체를 밝히려 든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술좌석의 명언을 합리화 시키며 구석으로 몰아 갈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견디다 못해 일단 주는 대로 받아놓고는 소 닭 보듯, 개 머루 보듯 해야만 어느 정도 감을 잡지만 굳이 싫다는 사람에게 기를 쓰고 권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바로 잡아야 할 술 문화가 아닌가 싶다.
남편도 내가 많이 마시지 못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얼마 전에 시동생 집에 가서 벌인 해프닝을 보고 나서는 수긍을 하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술 등신’의 실체를 본 것이다.
외국 출장길에서 선물로 받아온 이탈리아 산 포도주를 구하기 힘든 귀한 것이라는 시동생의 꼬임에 넘어가서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다가 탈이 난 것이다. 가슴이 조여들고 온몸이 붉은 물감으로 염색이 되더니 급기야는 조카 침대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포도주는 과실주에 불과해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사탕발림으로 옆에서 기를 쓰며 부추기던 남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걸 비몽사몽간에 보고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린 모양이다.
검붉은 포도주의 빛깔과 혀끝에 매달린 달콤한 향속에 말짱한 정신을 휘저어 놓은 독이 숨어 있는 줄을 ‘술 등신’이 알 리가 없다.
애주가인 남편의 권유로 맥주 한잔 이나마 마실 수 있었지만 웬 지 여자가 술 마시는 그림이 그리 예쁘게 보아지지 않는 내 사고가 어쩌면 나를 ‘술 등신’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술과 담배는 남자들만의 전용물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못하는 한 난 영원한 ‘술 등신’일 수밖에 없다.
왜 남자들만의 전용물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물음엔 딱 부러지는 답을 내리지는 못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 사고가 참 답답하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술이 가져다 준 폐해 중 여자가 술 마시고 아무렇게나 흩트리진 모습에서 전체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 술 먹고 함부로 취한 행동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가 주정을 하며 추태를 부리는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도 봐주기 힘들다.
겉으론 절대 남녀를 차별 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내심은 이미 차별 시키고 있는 내 보수적인 이중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술 못 마시는 내 잣대로 술 마시는 다른 사람을 저울질 하는 편견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술은 어른 밑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부분이다.
술도 적당히 마시면 기분 좋고 친목도모 할 수도 있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만 문제는 나사가 풀릴 만큼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는 달라진다.
알코올이라는 것이 이성과 판단력을 무력화 시키고 그리고 행동에 장애를 가져온다.
기억력 감퇴는 물론이고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지만 기를 쓰고 필름이 끊길 만큼 목에다가 들이붓는 심정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만취를 달래고 얼러줄 아량엔 인색해야 하는데 술로 인한 실수나 과오는 너무 쉽게 용서가 되고 이해를 해 준다.
‘그럴 수가 있느냐’로 항변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너그럽게 봐주는 게 또한 술 먹는 사회의 질서인 모양이다.
가끔씩은 취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술 힘을 빌려서 속에 든 얘기, 멀찍이 밀어 둔 얘기들을 쏟아놓고 싶은데 맥주 한 잔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재주를 가지고 정수리까지 탑을 쌓아놓은 얘기를 무슨 힘으로 풀어 놓는단 말인가.
풀어 놓아 봤댔자 설익어 푸덕거리는 건주정으로 밖엔 간주가 안 될 텐데 말이다.
이렇게 ‘술 등신’ 이다보니 깐깐하고 까다롭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술 한 잔 목에 털어놓고 객쩍은 얘기나 야담을 입에 올려야 쉽게 친해지는데 도무지가 바늘구멍 만한 틈새도 보이지 않으니까 대하기가 껄끄럽다고 한다.
그렇다고 실수를 염두에 둔 거절이 아니고 마시고 난 뒤에 겪을 고통에 지레 겁을 먹어야 하는 내 갑갑한 심정을 일일이 하소연 할 수도 없다.
술 먹고 풀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지인들의 밉지 않은 주문을 시원하게 받아주지 못하는 ‘술 등신’의 비애를 술 잘 마시는 사람들은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