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며칠을 무와 쪽파 사다 다듬어 씻고 절구고 했더니
무청김치와 동치미 무짠지 무고추장장아찌 고들빼기김치까지
단지와 통에 그득 채워졌다.
11월 월동준비는 오늘로서 대충 마무리 하고
이제 12월 배추김치만 하면 올겨울 김장은 마무리 될 것이다.
개운하던 참에 딸아이와 둘이서 단촐한 저녁까지 때우고 나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고 행복하단 느낌마저 든다.
저녁 식후 9시, 이제 뭘 할까 생각을 하다가 냉동실문을 열었다.
이것저것 먹다 남은 봉지들 빼곡하게 들어찬 공간을 뒤적이니
멸치와 오징어채등 마른반찬거리가 거치적거렸다.
그것들을 꺼내 식탁위에 죽 늘어놓고 손질해서 고추장과 간장 참기름 등
이것저것 양념 넣고 조물조물 해 볶았더니 밑반찬이 찬통으로
몇 개가 만들어졌다.
오늘도 음식을 조리할 때마다 늘 하던 습성대로 속으로 다짐했다.
요리책을 뒤적이지 않고도 손끝만 닿았다 하면 척척 깊은 맛의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을 때까지 음식솜씨를 길러 보리라라고,
늙어가면서도 점점 더 맛깔스러운 어머니가 돼보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어머니들은 누구나가 다 식탁에서
기본이 되는 모든 음식은 자동적으로 손쉽게 만드시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어른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음식에 관한한 별 어려움이 없이
저절로 배워가게 되는 걸로 알았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오니 남편의 집에는 노모인 시어머니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부엌에는 김치라는 게 아예 없었고 김치 대신에 잔칫날 쓰고 남은
참기름에 푹 절은 거절이 뿐이었다. 그건 남편 집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사시는
시누님 댁에도 마찬가지였었다.
시집 온지 한달여만에 김장철이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먹지도 못하고 쉬어 다 퍼다 버릴 김장을 괜한 돈 들여가며
왜들 하는지 모르겠다며 김장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말씀을 아들집에서고
딸네 집에서고 밥 먹을 때마다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시골에서 얼기 직전의 배추가 올라오는 바람에
느닷없이 김장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내가 갓 시집온 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배추를 절일 줄도 양념을 버무릴 줄도 아무것도 배워가지고 온 게 없이
요리에 관한 한 빈 깡통이던 나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진두지휘 하에
팔뚝과 온 몸에 고춧가루 칠을 철떡철떡 칠해 가면서 김장이라는 걸
하긴 했는데
아깝게도 그만 어머님의 예견대로 김치를 하나도 먹지를 못하고
다 퍼다 버리고 말았다.(어머니께서 누구를 가져다주신 것으로 기억함)
문제는 김장엔 양념이 많이 들어가야 되는 거라며 어머니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당신의 손 큰 만큼이나 엄청난 분량의 굴과 젓갈을 사다가 넣으셨고
설탕 미원에 김치는 무조건 짭짤해야 쉬지 않는 거라며 굵은소금을 자루째
가져다 놓고 어찌나 껸즈시던지,,,, 나중엔 찌개로 끓였음에도 바닷물보다도
짠 소금 맛이 울어나서 짠데다가 들큰한 미원과 굴 비린내가 어우러졌던,,
결국엔 아깝다고 누구를 가져다주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어머니는 배추포기 김치라는 걸 그때까지 여간해서
담지 않으셨다고 했다.(단 한번도 담아보시질 않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판단은 이리해도 저리 해도 배추로 하는 김치 맛은 맨 마찬가지일 걸
뭐할라고 돈들이고 번거롭게 양념 속을 만들고 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였다.
그러한 어머님의 투철한 상식으로 김장때에도 배추를 칼로 썰어 고춧가루
넣고 버무려 잡숫는 식이셨다고 했다.
배추에 적당한 양념과 무속이 어우러져서 맛이 나고 어쩌고 하는 이치를
그때까지 어머닌 깨닫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나는 시어머니께서 당신 딸집에 가셔서 고추장 된장 담가 주시고
하는 것만 보았을 뿐, 우리 집에서 손수 장을 담는다거나 장아찌를 만든다거나
가을철에 밑반찬거리를 저장해 둔다는 둥 어느 집 할머니들처럼 우리 어머니께서도
푸근하게 그리 하시는 것을 이제껏 경험해보지를 못했음이 늘 아쉬웠다.
어머니는 제사 때나 손님상에 놓는 손쉬운 동그랑땡마저도 빗지를
못하시는 거였다.
당신이 아예 못하시니 늘 구경만 하시다가 언젠가 옆에서 거들어 주시는데
동그랑땡 모양이 무슨 개 떡 우그려놓은 모양으로 되는걸 보고
속으로 60평생을 넘게 살림을 살아오신 분인데 아무리 솜씨가 없다 해도
이제껏 어머닌 뭘 하고 살아오셨는가 하는 생각에 은근한 실망과
내심으로 무시까지 되었던 경험이 있다.
어쩌면 모든 살림이나 며느리의 살림살이 일거일동을 못마땅해 하고
간섭하고 나무라셨던 어머니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때문에 나는 늙어서도 자식들에게
음식도 하나 할줄 모르는 부족한 어머니라는 느낌을 줄까봐
걱정이 되서,
모르는 건 요리책을 사다가보고 한다든가
나이 드신 경험자들에게 들은풍월로라도 흉내를 내 볼까 하고
작장생활 하라 애 키우랴 살림살이를 무지 귀찮아하던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만큼은 되도록 꿈지럭 거려보고 싶어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걸 보시는 어머니께는 늘 그 까짓것 사다 먹고 말지~하고 있냐는 식으로
부정적인 잔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막상 귀찮고 힘들어서 콩 자만 하나라도 사다 놓으면 무어라 하시지만..
좌우지간에 나는 시어머니를 봐 오면서 그래도 여자는 나이 들기 전에
음식만큼은 어느 음식이든 척척 버무릴 줄 아는 그런 어머니로 늙어가고 싶단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정성 드려 만든 음식을 제시간에 들어와서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나에게도 나타나겠지.. 하는 마음이 과한건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또 어떤 요리에 도전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요리책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