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승낙되고, 어디서 예식을 하느냐가 문제였는데, 남편이 다니는 용인의 직장을
놔두고, 서울에서 알아볼 수도 없고, 시댁인 부산에서 올릴수는 더욱 없었다.
결국 남편의 직장에서 예식을 하기로 했는데, 시댁에선 부산이 아니기 때문에 신부측에서
관광버스비를 내야 한다는것이다.
우리측도 손님들을 모시고 차를 대절해서 와야 되는 판인데, 누가 누구더라 차비를 달라는
것인지 참.......
좋은게 좋은거라고,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관광버스비는 그쪽에서 부담하라 하고 대신
식비는 계산해 드린다고 했다.
결혼이 왜 개인만의 혼사가 아닌 집안과 집안끼리란 말이라고 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됬다.
결혼약속 하기전에 우리가 모은 돈 약 천칠백만원 가량이 우리의 전재산이었다.
그 위로 형님이 한분 계셨는데, 형님이 결혼할땐 전세방도 얻어주셨다는데,
우리가 결혼할 당시엔 시부모님께서 너무 연로하시고, 생활능력도 없으시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없으시다기에, 우리가 모은 그돈으로 전세방을 얻기로 했는데,
어디 그돈으로 가당키나 한가말이다.
그저 결혼하면 좋기만 할줄 알았다.
그런데 첫 걸음부터 이렇게 힘들줄이야.
새 신부인 나는 시부모님에게서 양말한쪽도 얻어 입지 못하고 형님께서 준비하신
예물만 받았다.
그런 날 보며 우리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래서 신랑측에 보내는 예단비를 차라리 얘들 신혼집 장만하는데 보태주면 안되겠냐고
우리 부모님께서는 신랑측에 조심스레 전하셨고, 시부모님께서도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랑측 친척들은 많지 않았다.
시아버지께서는 이북이 고향인지라 홀홀단신 이셨고, 시어머니의 오빠가 계셨는데,
여태 살면서 그분들을 두번 뵈었다.
결혼식장 안에선 신랑측과 신부측이 굉장히 많이 비교가 되었다.
신랑측은 관광차 한대만 대절해서 왔는데, 그것도 다 차지가 않았다.
오죽 지인들이 없었으면 신랑의 형이 부주 받는곳에서 부줏돈을 받고 있었을까.
반면 신부측은 우리 엄마 형제들만 해도 9형제요, 아버지측 형제들만 해도 4형제 였으니,
사촌에 팔촌 친척들만 해도 관광차 두대는 훨씬 넘었다.
나는 우리 아빠의 큰딸이다.
그때는 아버지도 직장생활을 하셨을때라 아빠 직장에서만도 관광차 한대분의 동료들이
오셨다.
우리의 예상보다 하객들이 많아서 그의 직장에서 꽤나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점심도 못먹었다.
어쨌든 우리 부모님은 저렴한 식비를 지불할 수 있었다.
나의 구질구질한 삶은 이 결혼식때 부터이지 싶었다.
솔직히 나는 많이 서운했다.
시부모님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 서운함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신혼여행지를 해외로 정해서 여권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을때
나는 지금 우리의 형편상 무슨 해외냐고, 국내에도 가보지 못한곳이 많은데
기백만원씩 들여서 어떻게 가냐고 해서 예약을 취소했다.
삼천만원짜리 전세를 얻었는데, 그중에 우리가 모은돈이 약 1,700 만원, 우리 부모님께서
예단비로 주신돈 500 만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우린 은행에서 천만원을 마이너스 대출로 얻었다.
이 마이너스 통장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니 무슨 해외여행인가 말이다.
차라도 있었다면, 그냥 팔도를 돌아다녔을텐데, 차도 없었던 우리는 울릉도로 신혼여행지를
잡았다.
신혼여행에서의 추억은 없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친정에서 준비한 이바지 음식들을 가지고 시댁인 부산으로
갔다.
헉!!!!!!!!!!
내 25살 평생 그런집은 처음봤다.
우리친정은 잘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내 기억속의 우리집은 집을 짓기위해 잠시 남의집 살이를 한것 빼고는
부모님 소유의 집이 있어서, 지하 또는 아래층에 세도 들이고, 이층에도 세를 놨는데,
시댁은 평수가 8평이란다.
그런데 그중 반인 4평은 국가땅인데 몰래 쓰고 있는거란다.
세상에 이런데서 어떻게 6식구가 (그의 형제가 4명)살았는지.......
그의 형님은 결혼해서 시댁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의 거리에 따로 분가해서 살고 계셨다.
얼만전에 들은 얘긴데, 형님도 중매장이 한테 속아서 시집온거란다.
난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시댁이 좀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줄이야......
새식시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라곤, 큰 바구니에 회만 가득 떠왔더라.
그리고 들통엔 대구인지 뭔지인 생선을 넣고 탕을 끓였는데, 허여멀건한게 지금와
생각해보건데 아마도 지리였지 싶다.
하지만 난 그때까지 지리란건 한번도 먹어본적도 들어본적도 없었기에, 이게 뭔가 싶었다.
형님은 식초를 가져와서 간이 안맞으면 넣어 먹으란다.
난 뒤로 넘어갈뻔 했다.
그리고, 어떻게 새색시가 시집온 첫날부터 입안 가득히 상추쌈을 싸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원........
난 밥과 김치만 몇 수저 먹고 말았다.
식사를 하고 시부모님께서 바로 욕실앞에 계시는 지라,조심스레 세수를 하고
(여름이 아닌게 천만다행 이었다.) 우린 이층으로 올라갔는데,
이렇게 이층이 있다는게 참으로 놀랠 일이었다.
우리가 오기전까진 창고식으로 쓰고 있었는데, 신혼부부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치워
놓으셨다.
겨우 두사람이 누우니까 딱 맞다.
자고 있는 남편을 보니, 참으로 내 자신이 한심스럽고,마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것
같았다.
나는 어려서 부터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손에 물도 안묻히고 살거라 부모님과 사촌들에게
큰소리 떵떵 쳤는데, 이 집을 보시면 아마 우리 친정엄마는 속상해서 하루종일 우셨을 거다.
나는 지금도 우리 시댁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 안한다.
이렇게 사는 나를 우리 엄마가 어떻게 생각 하는지 알기에.....
다음날 아침 새신부는 일찍 일어나서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침을 먹고,
시댁에서 준비한 이바지 음식을 들고 다시 서울로 왔다.
친정에서 준비한 음식은 정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남편은 그 차이점을 알고나 있었을까?
친정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우리는 또 우리의 보금자리인 용인으로 왔는데,
신혼여행지에서 서울로, 시댁인 부산으로, 또다시 친정인 서울에서 용인으로 오는
여정이 참으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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