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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할머니의 팔순


BY 김연주 2006-10-09

 음력 11월15일

외할머니의 팔순생신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생신때문에 형제자매들끼리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상의하는

모습을 보시곤, 당신 자식들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다시며 막내아들이 사는 제주도로

훌쩍 떠나오셨다.

 하지만, 그냥 생신도 아니고 팔순이라는 이름이 붙은 생신인지라 친정엄마를 비롯한

모든 자식들이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내려가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할머니께서는 미안한 마음에서였는지 아니면 이미 계획을 세우신거였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준비하셨다.

 

드디어 할머니의 생신상이 차려졌고,

먼저 가신 큰이모를 제외한 9남매가 한자리에 모여 미역국을 먹곤

상을 물리치고 모두 할머니께 절을 올렸다.

친손주든,손녀든, 외손주든 그자리에 참석한 손주는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아! 물론 내가 제주도에 살기때문이지만...^^

아참 잊었다.

막내삼촌의 자식들이 있었다.(나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깜빡했다.)

외할머니께 절을 올린다음 할머니의 덕담을 기다리며 앉아있던 삼촌과 이모들은 할머니가

준비하신 그것때문에 다들 울음바다가 되었다.

 당신이 평생을 돌덩이 지어다 모은돈,식당일하며 모은돈, 마늘까서 모은 쌈지돈을 모두찾아

삼촌과 숙모, 이모들과 이모부들의 몫으로 순금3돈씩을 준비하여 안에는 

....사랑하는 엄마가...가 새겨져있는 링반지를 각자 한사람씩 드리며, 그동안 잘살았다고

하시며 주었다.

또한 당신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노잣돈이나 하라며 봉투안엔 이십만원씩이나 넣어

건네주었다.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다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그렇게 어렵게 모은돈 왜 이렇게

쓰냐고, 당신 드시고 싶은거나, 다니고 싶은데 있으면 다니지 그러냐고......

할머니께서는 이제 당신이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냐고, 엄마가 해준것도 없는데

잘 자라주어 고맙다고, 엄마를 기억해달라는 뜻으로 준비했다고 하셨다.

올해는 금값이 참 비쌌다.

지금도 비싸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7만원이 넘었던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외할머니는 참 억세셨던것 같다.

열여섯에 시집와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와 남편의 끝없는 외도와 노름.

끝내는 대궐같은 집과, 머슴을 3명이나 부리고 사셨던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셨다고 한다.

나보다 4살많은 막내 이모가 아주 어려서 외할아버진 돌아가셨다.

다행히, 우리 친정엄마를 비롯해 몇명은 이미 결혼을 했다.

그래도 남아있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할머니는 공사판을 돌아다니시며 돌을 날랐다고 한다.

그리고, 내기억엔 내가 어렸을때 우리집에도 오래 계셨었다.

그땐, 사무실같은데 밥해주고, 남은 반찬은 간혹 집에도 갖고오셨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사셨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잘날리 없다고,

바람불면 이놈때문에 걱정, 비가오면 저놈때문에 걱정.

항시 걱정과 함께 삶을 살아오신 할머니.

얼마전까지만 해도 할머닌 장사때문에 제주도에 내려가신 네째삼촌의아들 밥을 해주기위해

성남에서 사셨다.

그러다, 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해져서 큰아들네로 갔지만 할머니는 편하지 않아 하셨다.

점쟁이말이 할머니가 아들앞을 막는다 하여 할머닌 큰삼촌댁에 가계시는걸 꺼려하셨다.

 다행히 할머니는 금세 회복하셨다.

몸을 추스리자 삼촌네로 이모네로 돌아다니셨고,

그런와중에 팔순을 맞이하셨다.

제주도에서 할머니 생신이 지나, 구정도 지나, 막내삼촌의 생신이 되어 가족들이

삼촌네댁에서 하루를 묵었다.

전날, 숙모들이랑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할머니 말씀하시는 폼세가 좀 이상했다.

뭐랄까 치과에 가서 마취안풀리고 말하는것 같다고 할까 암튼 약간 어눌한듯 했다.

서로 이상하네 이상하네만 하곤 그밤을 넘겼다.

다음날이 되서 막내삼촌을 비롯 우린 미역국도 못먹고 돌아왔다.

할머니의 증세가 심각해져서 삼촌들은 할머니를 제주시에 있는 한방병원으로 모시고 갔다가

큰병원으로 모시라는 말에 서울에 있는 구로고대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추석보내러 가마 하셨는데, 이렇게 안좋은 일로 보내서 여기남아있는 우리들은 마치

죄인같았다.

 

서울에서 상당기간 입원해계셨던 할머니를위해 간병인을 쓰자 했지만,

친정엄마의 만류로 엄마가 직접 간병을 하셨다.

사실 그당시에 엄마도 할머니를 간병할 건강한 몸이 아니셨다.

멀리있는 큰딸 걱정한다고 쉬쉬했다는데, 아직 환갑도 안된 엄마도 풍이 와서 반쪽이 마비가

됬었단다.

무리하면 안된다고 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삼촌들이 누나 힘들다고 간병인 쓰자고 했는데도

당신 힘닿는데까지 해본다고 엄마가 직접 간호하시고 할머니가 퇴원해선 집으로 모셨다.

할머니께서 얼마나 더 사실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해야 되는거 아니냐면서.

그래야지 후회하지 않을것 같다시면서.

참으로 많은 걱정을 하였지만, 나도 아이들 데리고 먹고 살기 빠듯했기 때문에

엄마를 전혀 도울수가 없었다.

 

참 슬픈일이다.

자식들을 12명이나 두어, 두명은 어렸을때 죽고,

제일 큰 이모내외는 내가 어렸을적에 돌아가셨다.

큰이모는 결혼하자마자 제주도로 가셔서 사실상 맏이노릇은 항상 엄마몫이였다.

자식들이 9이나 있는데,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자식들이 못사는것도 아니다.

밥먹고 살 형편들은 되는데도 할머니를 우러나서 모시고자 하는 아들들이 없다.

할머니가 퇴원해서 당연히 큰아들네로 가야했지만, 할머니가 너무나 싫다고 하셔서

그럼 우리집에 가계시자고 아빠가 모셔왔단다.

할머니가 가시는 날엔 얼마나 우셨는지 모르신다고 엄마는 속이 상해 말씀하셨다.

남자같은 엄마 성격에 동생들 하는 폼이 맘에 들지 않으면 한바탕 하시는데,

그럴때마다 하시는 말씀들이

출가외인은 빠지라고?

그러면서 어려운일 있으면 딸들은 자식아니냐고.

그래서 그런지 삼촌들과 이모들과의 골이 크다.

 

자식들도 살만하니 이제 노년을 편하게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사실만도 하건만,

큰 아들 눈치나 보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심정은 오죽하실까.

추석을 맞아 할머니께 안부인사를 드렸다.

아직도 정확한 발음이 안나신다.

통통하셨던 할머니가 이젠 백발이 성성하고 비쩍 마르신게 속상하다.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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