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나한테 시집와서 해 놓으 게 뭐냐? 왜 제대로 해 놓은 게 뭔디? 거지주제에 생활비는 왜 달라고 하는 겨? 잘난 것도 없으면서, 지지리 친정에서 오죽 못 났으면 혼수도 제대로 못 해온 주제에.... 뭐 이런 말도 말고 무지들은 게 많은데. 이렇게 글을 남기 줄 알았으면 , 좀 적어 놓고 그럴 걸 그랬다. 대한민국의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 보고ㅡ 가슴 아프고 상처가 깊어 입 밖에 내놓는 것도 싫었을 테고. 그 중에 나도 그런 분류인 가슴 오그리고 살 던 여편네다. 아니 며느리였다. 딸 낳으면 죄인이 되는 여자들이 맨 천지이다. 그럼에도 그 역활은 여자이기 전, 가부장제도에 의해서 우선시 되는 잣대에 여자가 턱에 못 미칠 만큼 차별은 여전하다. 괜히 남녀 평등이라고 할까. 하긴 이제는 양성평등이라면서 남자는 무조건 돈 벌어오기, 아니면 여자는 무조건 집에서만 일하기식의 고정 관념도 얘들 가르치는 교과서에서도 퇴출된 유물이 되었다. 사회가 이런 흐름을 타고 흘러도 우리네 생활저변엔 아직도 그 깊은 죄인의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특히 그 놈의 명절은 가혹한 계절을 여자들에게 선사한다. 매 번 당해서 이젠 아예 피하는 방법도 연구하고, 맞대응 하는 잔머리 굴리기도 하건만. 마주치면 입에서 뱅뱅 돌기는 매번이다. 어쨋거나 나는 쫒겨난 며느리로서 벌써 십년이 들어가고 있다.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못 보고 지낸 명절이 벌써 십주년이 되가나 보다. 차라리 남북이 분단되어 가지못 할 곳이라고 못 뵈는 핑계라도 쉽지만, 쫒아 낸 며느리 다시 부를 리 없고, 쫒겨난 입장이야 불러도 아쉬울 처지가 아닌 이상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시집이다. 그런데 점입가경이라고 하더니 나의 둘째 동서도 이혼을 하더니 소식이 두절 되버리고, 셋째 동서는 재 작년에 이혼을 햇다고 이젠 시집과 전혀 관계가 없이 살고 싶다고 연락을 한게 바로 나에게 울면서 전화를 한 것이다. 어이가 없다. 우째 이런 일이 소설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니 내가 겪어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이 각박하게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끝인 줄 모르는 것처럼, 나도 한 참을 어리벙벙하게 지낸 지난 십년세월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곱씹어 생각을 안 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쫒겨난 며느리로서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엄연히 두 생명을 낳았고, 남편과 함께 이룬 나의 가정에 누구의 물리적인 힘에 의해 파경을 맞는 그리 만만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시부모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 불똥이 그렇게 두 동서에게 내림으로 일을 당하고 말았다. 큰 형님이라고 제대로 막아주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 두 동서에게. 셋째동서에게 연락이 왔다. 이젠 동서라고 부르지 못하는 관계다.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 동서를 이젠 이름을 부른다. 그래도 동서는 나보고 형님이라고 부른다. \" 형님! 이번 추석이 무척 길잖아요...우리끼리 어디 여행가요?\" \" 여행?\" 추석에 할 일이 없는 맏며느리가 난 줄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동서는. 어디로 갈까? 일박 이일코스도 있고, 이왕이면 한적한 가을 바다가 있는 작은 포구도 괜찮다고 나는 크게 목소리를 울렸다. 시집이라면 자다가도 경기가 난다는 셋째동서는 시집의 큰 형님보고 여행을 같이 가자는데, 무슨 옷을 입고 갈까요? 하고 나에게 느닷없이 문자가 왔다. 동서는 추석여행을 앞두고 멋진 꿈을 꾸고 있다. 나도 덩달아서 한 번 추석여행을 다녀 올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