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사망 시 디지털 기록을 어떻게 처리 했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주세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25

육체는 굴욕을 기억한다


BY 불토끼 2006-07-24

한겨레 21을 읽다가 초등학생 체벌에 대한 기사가 나와서 유심히 읽어보았다.

\'육체는 굴욕을 기억한다\'라는 박스기사.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 육체 또한 아직까지 기억하고있는 굴욕이 있었다.
20년이 지났음에도 지워지지않는 굴욕이다.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시대의 체벌에 대해 잠시 짚어보도록 하겠다.


체벌의 유형은 여러가지다.
군대에서 파생된 단체벌로 \'원산폭격\', \'깍지끼고 엎드려\',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가 있었고
아침조회에서 파생된 단체벌로
\'주구장창 앞으로 나란히\'를 해서 몇십분 있어야하는 벌이 있었다.


개인벌로는 \'어금니 꽉깨물어\'가 있었다.
이빨이 깨어질 수 있으니 체벌전에 \'어금니 꽉깨물어\'가 실시된다.
그러면 해쳐모여를 해서 애들이 일렬종대로 우루루 선다.
그 앞을 선생님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볼때기를 주먹으로 치는 벌이었다.


도시락벌도 있다.
2교시지나서 도시락을 까먹으면
3교시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냄새를 맡고 도시락검사를 하신다.

미리 도시락 까먹은 애들은 빈 도시락을 들고 복도에 서있어야 했는데
그 수가 과반수가 넘을 시에는 수업진행이 안되니
까먹은 애들은 책상위에 올라가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이런 벌들은 내게는 인격적인 모욕이긴 커녕
하품나는 수업시간에 그나마 즐길 수 있는 특이한 장난이었을 뿐이었다.


이 외에도 회초리로 종아리맞기, 밀대 손잡이로 엉덩이 맞기 등은
체벌의 고전에 속하니 언급을 생략하도록 하겠다.

나도 맞을만큼 맞고 학교다녔지만 속이 있는 애였는지 없는 애였는지
한대맞고 복도에 꿀어앉아서는 킥킥대며 불나는 궁둥이를 바닥에 문렀을 뿐
상처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도리어 그 당시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렸을성 싶기도 하고.



이렇듯 내게 있어 체벌은 성장기의 아픈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내 학창시절에도 내 육체가 기억할만큼의 굴욕이 딱 한 번 있었다.



때는 중학교 2학년.


1학년때는 교실이 별관에 있어
한 번 걸리면 박살이 난다는 학생과장을 볼 일이 별로 없었는데
교실이 본관에 있는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생과장의 쓴맛을 무섭게 봐야했다.

아침자습때면 학생과장은 불시에 전 학급을 주욱 시찰한다.
그때마다 망보는 애들이 \'학생과장(별명을 불렀음) 온다!\' 하면
1반부터 주욱 도미노로 전달이 되어
학생과장이 우리반인 6반에 도착을 할때면 자연 조용했었는데

문제는 학생과장이 1반부터가 아닌 끝반부터 시찰을 할때다.
끝에서 두번짼가 있었던 우리반이었던 지라
학생과장이 불시에 끝에서부터 시찰을 돌라치면 십중팔구는 걸리는 것이다.

이때 단체벌을 받았다면 상처가 덜했을텐데 학생과장은 꼭 실장을 대표로 때렸다.

 
회초리로 손바닥을 좀 때린다던가 몽둥이로 엉덩이로 때리면 맞고 말겠는데
이건 출석부로 되는데로 아무데나 닥치는데로 내려치는 것이다.

두꺼운 나무판때기같은 출석부로 머리를 대여섯번 얻어맞고 나면
머리통이 아프고 머리카락 역시 산발이 된다.

그뿐인가. 머리에서 시작해서 어깨로, 팔로, 엉덩이로
신체부위를 가리지 않고 쉬지않고 출석부가 마구 날아온다.

이렇게 출석부로 실컷 얻어맞고 머리카락은 산발을 해설랑은
내 자리에 가서 앉을라 치면 맞은 곳이 아프기도 아프지만
혼자맞은게 억울해서 울먹울먹하게되고
애들 앞에서 실장으로서의 체신이 안서게 산발이 되도록 맞은게 부끄럽다.

이쯤되면 성질같아서는 책보를 싸서 집으로 가고싶지만
간뎅이가 작아서 그것만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굳혀 앉아있다.

상황이 이러니 학생과장이 바라는데로
애들은 실장에게 미안해서라도 남은 자습시간동안 조용하다.

애들의 기억력이 하루를 가면 용치.
이같은 일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거의 매일 일어난다.
교무실에서 멀찍히 떨어진 2학년 6반 실장이었기던 나는
교무실 바로 옆에 붙은 2학년 1반 실장이 어찌나 불쌍하던지...

이런걸 두고 동병상련의 아픔이라고 한다지.


그런데 3학년이 되자 나는 3학년 1반 실장이 된 것이다.
실장투표때 안할라고 안할라고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두 번 실장이었다는 과거는 주홍글씨처럼 내 가슴에 새겨져서
3년내내 운명처럼 실장을 하게된 것이다. 

그 중학교 3학년,
 1년동안 나는 얼마나 몸서리나게 맞았는지 모른다.


딱딱한 출석부가 너무 싫었고
학생과장이란 인간이 너무 싫었고
오죽했으면 그 학생과장이 사는 동네는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학생과장이 당시 우리 아버지와 좀 아는 처지라
내가 교무실에만 가면 나를 불러앉혀놓고 유들유들 웃으며 친한척을 한다.

\'아버지 어떻게 지내시냐,
언니는 공부잘하고있냐, 할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
\'올개 복분자 농사는 잘됐냐\',
\'왠만하면 같은 재단의 여고로 진학하지 그러냐\'

아침에 그렇게 눈에 불이나게 때리던 양반이 어쩌면 그렇게 안면을 바꾸어
친한척을 하는지 생각같아서는 얼굴색을 딱 바꿔서 쌀쌀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일개의 학생이 추상같은 학생과장에게 그럴 엄두도 않나는 일이고...


요즘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체벌과정이 핸드폰으로 찍히고
인터넷으로 퍼날라지고해서
종국에 가서는 학생과장이란 인간이 죽일놈이 되어 추적60분에 나왔을 것이다.
허나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은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라
그 일을 우리 아버지께 말씀드려봤자 씨도 안먹혔을 것이 뻔하다.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다보면 때릴 수도 있는 일이지
그런 일로 사람이 체신머리 없이 학굘 찾아간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했을성 싶은 말의 요점정리다.


우리 아버지가 지금 60대 후반이시니
지금 그 학생과장도 퇴직한지 벌써 몇 년이 지났을 것이다.


우리때는 좀 그랬다.
정부가 군사정부고 대통령이 군인이고보니 어디나 폭력이 넘쳤다.
때리면 좀 맞고, 맞고나도 아무일 없다는듯 끝냈다.
맞고 때리고 그런걸 인권과 연결해서 생각할 만큼
요즘처럼 개화된 부모도 없었고
시민운동도 활발하지 못했다.

사회가 바뀌면서
같은 일을 해도 옛날엔 죽일놈의 행위가 아니었는데
요즘엔 죽일놈의 행위로 판결내려지는 것들이 허다하다.
(그게 사회가 성숙되는 증거라 생각해 기쁘다)

어쨌거나.

내가 길을가다 그 학생과장을 만났다면 난 뭐라 했을까?

3년을 그렇게 맞고 학굘 다녔지만,
속이 있는 앤지 없는 앤지
학생과장을 만난다면 기쁜 마음이 앞설 것 같다.

안부를 두루두루 묻고는 그래도 한때 오지게 맞았던 기억이 있으니
끝에 가서야 슬쩍 그때 맞았던 일을 얘기하겠지.

간뎅이는 작아가지구선 딱 까발리고 말하지 못하구선
이렇게 돌려서.


\'선생님, 그때 출석부는 왜그리 두꺼웠을까요?
그걸로 안맞아본 사람은 모른답니다. 얼마나 아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