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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장례식(2)


BY 개망초꽃 2006-07-24

수전증 목사님은 목소리가 작아서 양쪽 귀를 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 잡다한 생각도 잠시 미뤄두고 조아리고 앉아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었다. 작은아버지 아들부부가 다니는 교회 성도들이 오셔서 장례식을 인도해 주시고 조문객들 식사도 챙겨주었다.


흰 국화로 치장한 사진틀 속엔 작은 아버지가 편안하게 앉아 계셨다. 사진 속에 작은아버지는 고집스럽지도 괴팍하지도 화난 표정도 아니었다. 왜 이제 왔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그땐 미안했다. 어린 네가 뭔 잘못이 있다고, 다 가난이 죄였단다. 하신다.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 같던 뻣뻣한 몸뚱이가 눈물로 흔들린다. 영정사진속의 작은아버지는 나만 쳐다보신다. 지금은 밥 잘먹냐? 깨작거리고 안 먹더니, 살림은 잘 하냐? 약해빠져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더니…….눈물이 작은 아버지를 가려버린다.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낫겠다. 작은아버지는 나를 보기만 하면 밥 먹는 걸 타박하시고 살림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옛날 어른들 고정관념 속에는 밥을 잘 먹어야 복이 있고, 뼈가 굵고 키가 작아야 살림을 잘한다고 여기셨는데, 나는 거기서 한참 벗어났으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도 그 말은 빼지 않고 꼭꼭 하셨으니 그래야 직성이 풀리셨나보다.


작은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몇 년 동안 누워 생활을 하셨고, 결국은 다리 한쪽을 못 쓰시는 불구자가 되셨다. 직장도 잃을 수밖에 없었고 동두천 집도 처분하고 성북동 산꼭대기 월세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에겐 부모도 없는 삼형제뿐이었는데, 부모님이 물러주신 건 가난밖에 없어서 험한 세상을 거칠고 험하게 살아내야 했다. 큰 형이었던 아버지는 결혼해서 어린 삼남매를 놔두고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고, 둘째는 교통사고로 불구자가 되어 방한 칸 건질것 없이 살던 곳을 떠나 성북동으로 절뚝거리며 그래도 붙은 목숨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사를 한 것이다. 그 방 한 칸도 막내작은아버지가 얻어주고 생활비도 대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곳에 나는 다시 엄마가 싸준 보따리를 들고 천덕꾸러기로 눈치를 보며 구석지에 팽개쳐져 있어야했다. 풀 한포기 나지 않던 성북동 산꼭대기는 장롱도 들어가 앉을 곳이 없던 좁다란 방 한 칸. 비참했다. 불구의 몸으로 누워만 있던 작은아버지는 동두천에서 빵을 골고루 나눠주던 그 작은아버지가 아니었다. 계모 같던 작은어머니와 닮아 계부가 되어 있었다. 처참했다. 밤마다 엄마를 부르지도 못하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강원도 외갓집에 살 땐 우등상을 받았는데, 성북동에 와서는 책도 더듬거리며 읽지 못했다. 그때가 오학년이었으니 선생님은 내가 국어 쪽으로 머리가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장례식장은 아담했지만 깔끔했다. 깔끔한 음식과 함께 도움이 아줌마가 두 분이나 계셔서 우리는 할 일이 없어서 긴 의자에 한 줄로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작은어머니와 오랜만에 오래도록 지난 이야기며 현재 이야기를 밤이 늦도록 했다. 계모 같았던, 나의 생김새를 가지고 트집을 잡고 때리던 작은 어머니는 그때의 그 작은어머니가 아니었다. 여전히 예쁘구나, 네 소식을 듣고 울었단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작은어머니는 조촐한 얘기부터 소소한 사건과 작은아버지의 돌아가시지 전 모습까지 줄줄줄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안하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성북동에서 초등학교 졸업을 하면서 풀 한포기 없던 작은집을 벗어나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성인이 된 다음 작은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었다. 그때도 나를 보더니 예쁘게도 컸다시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시며 내 손을 잡고 우셨다.


단양은 이번 장마로 수돗물이 끊긴 곳이 많단다. 작은 집도 물이 안 나와서 콘도를 잡아서 편하게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오래 앓다가 돌아가셔 그런지 작은어머니와 자식들만 문상객이 오면 영정사진 앞에서 조금씩 울뿐 장례식 분위기는 활달했다. 작은아버지 슬하에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순수해 보이기는 하나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아들은 군청 공무원이고, 나보다 팔다리가 긴 딸은 올 시월에 결혼을 한다. 팔다리가 나보다 긴 딸을 가리키며 어릴 적 모습이나 하는 짓이 나랑 닮았다면서 작은어머니는 웃으신다. 나도 따라 헛헛하게 웃었다. 다음날 아침, 콘도 베란다에서 바라다 본 풍경은 이국적이었다.  해외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우런 강물을 보니 중국의 이름모를 고장 같았고, 빨간 지붕의 주공 아파트와 뽀족뽀족한 지붕과 고풍스런 건물이 강가에 세워져 있어서 유럽의 작은 마을 같았다. 으~~아~~~ 으~~~와~~~ 창밖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감탄을 했더니 남동생이 어느절에 내 옆에 와서 같이 따라 으~~아~~~그런다. 그러더니 올케도 곁에 와서 나처럼 한참 풍경에 풍덩 빠져 버렸다.


이른 아침 국화와 백합에 파묻힌 작은아버지 영정사진이 움직였다. 하얀 보자기를 두룬 나무관이 영정사진 뒤를 따라 찬찬히 움직임을 시작했다. 작은어머님이 손수건을 입에 대고 소리 내어 우셨고, 팔다리가 나보다 긴 딸이 눈물범벅이다. 수전증 목사님 손이 겨울바람 문풍지처럼 떨린다. 날씨는 화창하다를 넘어서서 상쾌 쾌청했다. 오랜 장마는 수로를 끊어 놓고, 산길을 문질러 버리고, 도로를 파먹었지만 작은아버지 발인날은 겹겹이 이어진 산허리가 부드럽게 멀리까지 보이고, 길가 나뭇잎은 한 잎 한 잎 유리세정제를 뿌려 마른걸레질을 한 것같이 윤기가 흘러내렸다. 작은 아버지를 실은 버스는 단양을 지나 제천으로 뭐가 신난지 신나서 달려갔다. 세상 시름과 고집스런 욕심과 오랜 병마를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작은아버지는 신이나서 달려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