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이었을 때였을까 내 엄마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게.
섬에 내려가기 훨씬 이전이니 삼,사학년 무렵일까.
날 낳고 취미삼아 배웠다는 미용기술이
엄마의 주업이 되어지게 될줄은 애보기 아이를 두고살던
내 갓난쟁이 무렵에는 상상도 하지 않으셨을게다.
심심해서 배우셨다는 미용기술의 솜씨가 좋았던 지
\"온식구가 굶어죽게 생겨서 내가 나서야했었지
내가 배웠을때는 불퍼머였는데 약으로 하는 퍼머가 마악
시작될 때라서 첫 손님을 받아가지고
서툰 솜씨로 롯트를 감느라 하루 온종일을 헤멨어야
다행이도 머리가 잘 나와서 그 아줌니가 단골이 되었재\"
그렇게 시작된 단칸방에서의 무허가 미용실은
어떨땐 점심을 드실수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그때의 부모님 사진을 보면 일류멋쟁이 저리 가라다.
일제 천으로 만든 맞춤 투피스에 선글라스를 쓴 엄마
그리고 가죽 점퍼를 입으신 아버지 사진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가 않다.
그렇지만 동생들을 임신하여 입덧이 시작된다거나
산달이 다가오면 일손을 놓으셨는데
저축과는 담을 쌓고 사신 어머니이기에
곧바로 끼니꺼리를 걱정해야만했다.
어느날인가 어머니의 한복을 보자기에 싸주시며
전당포에 날 보냈는데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것이 온당치 못한 일인것만 같아
전당포에서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며 행여 누가 볼세라
두리번거리며 잽싸게 그곳을 벗어나던 그날
왜 엄마는 돈을 아껴쓰지않고 이런데 날 보내는 걸까
속이 너무 상했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그 일이 계속되었는데
삼촌댁을 향해 집을 떠남으로써 전당포 가는일은 끝났다.
언젠가 한 기독사이트 마음나누기란에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애증의 골이 깊은
아픔을 토해내는 글을 올린적이 있다.
\"열일곱 꽃피는 나이에
내이름은 공순이였다
시린입김 내뿜으며
블럭담길 돌아서면
저 멀리 피어오르던 연기
허기진 배를 움켜쥐지않아도 좋을
내 가난한 형제들의 웃음이었다\"
연령 미달인 이유로 두 살 위의 언니 이름으로
취업했던 밧데리공장에서의 그 일이 있기전까진
여덟 살 고사리같은 손으로
돌확에 보리쌀을 갈아 밥을 짓는 어미노릇 대역이나,
집을 떠나 애보기로 가야했던
열두 살 해질녘의 서러움도,
언니가 다니는 학교를 가지못함에도
왜 나만이냐고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던 아이가
\"이렇게 사는 거 그만두고 싶어\"
읊조리며 자살을 시도한 건 그 일이 있고나서였다.
\"그때 네가 굶어죽게생긴 우리 식구들을 먹여살렸어야\"
형제들이 모일때면 들먹이시는 어머니의 회상처럼
어머니 생애 제일 힘든 시기였다는 때였다지만
그래도 내 월급을 담보로 외상을 주는 단골가게가 있어
자살을 시도하기전까진 그런대로 행복한 청춘이었다.
내가 취직한 곳은 그 지역에선 꽤나 큰 공장이었는데
또래거나 멋쟁이 언니들이 많은 여자들의 천국이었다.
동네 다른 친구들은 한달에 두 번 쉬면서
밤늦게까지 일해도 적은 월급을 받는 영세업체들인데 반해
그곳은 토요일 오전까지 일하고 일요일도 쉬기 때문에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