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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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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의 첫사랑.(6)-나쁜 놈.


BY 일상 속에서 2006-06-21

 

“...아니...”


소녀의 대답에 바로 누워있던 철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 철의 냄새가 났다. 예전부터 익숙한 듯, 편안한 냄새였다. 그 냄새는 소녀가 좋아하는, 할머니와 지내는 집의 뒷동산의 풀냄새와 비슷했다. 좋았다.

두근 두근 두근...


“왜 안자?”

“...”

그러는 형은 왜 안자, 하고 묻고 싶은 소녀...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긴장해본 적이 없었다.

자주 가는 병원에서 맞는 주사바늘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던 소녀였다. 후끈거리며 달아오른 얼굴이 그나마 어둠속에 가려져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잠이 안 와. 우리 얘기 좀 하다 잘까?”

“...무슨 얘기...?”

“그냥 아무 얘기.”

“없어... 할 얘기.”

“너 아주 유명하더라. 얘기 많을 것 같은데.”

“내...내가 뭐가 유명해?!”

“그냥, 재미있는 애라고 생각했어. 말만 듣고는...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말과 좀 틀린 것 같다.”

“형태 형이 뭐라고 그랬는데...내 얘기?”

“큭큭큭... 웃긴다. 여자가 자꾸만 형이라고 하니까. 하긴 듣던 것처럼 특이하기도 한 것 같어.”

“...지금 나 흉보는 거야?”

“또 화났어? 너 잘 삐치는구나. 큭큭큭...생각해봐라. 여자가 남자한테 형이라고 부르는게 평범한 건 아니지.”

“그건...”

철의 말에 이의를 달수 없었다. 자신 역시 별난 성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을 잊지 못하고 있을 때, 철의 손이 소녀의 얼굴 쪽을 더듬더니 머리 위로 올라갔다. 소녀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돋추세웠다.

“왜 그래!”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드라마에서 본 연인들은 서로 키스도 잘 주고받았다. 소녀 역시, 드라마 속 멋진 남자 주인공과 키스하는 여배우를 엄청시리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급진(?)하는 둘의 사이... 이건 아니 싶었다. 소녀의 반응에 못지않게 놀란 듯, 철이도 따라 앉았다.

“아...아니, 네 머리가 만져보고 싶었어. 난...긴 머리를 좋아해... 옛날에 우리 엄마도 머리가 길었는데... 언젠가부터 짧은 머리로 자르시고는...쭉 그 머리야... 놀래 켜서 미안하다.”

소녀...역시나 김칫국물이었다. 너무 앞서간 듯 했다. 왜 철이 자신에게 키스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을까...밤이길 정말 다행인 소녀가 다시 어정쩡하게 누웠다. 그리고,

“그럼, 만져봐. 머리만 만져.” 하고 강조했다.

“머리만 만져? 그럼 내가 또 어딜 만질까봐? 그리고 싫어. 이제 됐어.”

“-_-^ 만져보라고...큰 맘 먹고 만지라는 거야. 난 누가 내 머리 만지는 정말 싫어한단 말이야. 우리 반 놈들도 그래서 얼마나 나한테 맞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살짝 이성을 잃은 소녀는 다시 안정을 되찾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성질이 카멜레온이 ‘형님’할 만큼 다혈질인 소녀. 제 입으로 자신의 행실을 누설(?)하고 말았다. 후회막심+막심한 그녀, 자신의 혀를 꼬집어 주고 싶었다.


“큭큭큭...너 정말 재미있다. 너 같은 여자에 첨 봐. 그리고 삐칠까봐 미리 말하는데 놀리는 것은 아냐. 난 얌전하게 새침 떠는 애보다 너같이 꾸밈없는 애가 좋더라.”

좋더라....좋더라...

‘벌써 사랑 고백씩이나...이건 너무 앞서가는 건데...’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소녀...행복의 강물에서 얼마나 헤엄치다 늦은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소녀는 잠에서 깼다. 일어나 보니 집이 텅 비어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 11시가 넘었다.

집 안이 절간처럼 조용한 것을 보니 혼자인 듯 했다.

소녀가 덮고 자던 것 외에 가지런히 개켜진 이불이 벽 한쪽으로 놓여있었다.

거실로 나오니 엄마가 차려 놓은 밥상이 있었다. 상보를 치우니 빈 그릇들이 바싹 말라있었다. 소녀는 간밤에 황홀한 시간이 꿈이 아니었을까 했다.

하지만 빈 밥그릇 수가 전날에 있었던 모든 일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늦게 일어난 벌로 혼자 밥 한 술을 뜬 소녀는 다시 집안 정리를 했다.

점심시간 후로 소녀는 다시 외할머니에게 가야 했다.

그래야만 숙제를 해갈 수 있을 테니. 주말마다 있는 일이라, 이제는 익숙해진 그 생활이건만 새삼스레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이유야 당연히 오매불망 보고 잡은 ‘철이 왕자님’ 때문.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방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진영이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누나, 이제 일어났어? 우리 이모네 가자.”

“싫어, 거길 왜 가. 너 거기서 또 심부름 하다가 온 거야?”

“아니, 지금 이모네 영진 누나하고 형태 형하고 철수하고 호진이하고 철이 형이 있는데, 철이 형, 춤 진짜 잘 춘다. 전 영록하고 똑같아.”

“...철이 형이 춤을 춰?”

“응.”


진영이는 물을 마시러 왔는지 냉장고에서 꺼낸 물만 마시고 다시 급하게 나갔다. 자신과 있을 때는 얌전한 얘기만 꺼내더니, 영진 언니 앞에서 춤을 췄다는 철의 얘기를 듣는 순간, 샘 많은 소녀... 껄쩍지근한 마음이 되었다.

이모 댁,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안 가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급하게 걸레질을 끝낸 소녀가 이모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동생 진영의 말대로 이모네 거실에는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공주라도 된 숏 팬츠 차림의 영진 언니가 의자에 앉아서 철의 현란한 춤을 구경하며 까르르르...숨이 넘어갈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야, 지지배야, 왔어?”

영진이 전 날의 일이 생각난 듯 보자마자 소녀에게 쏘아붙였다.

춤을 추던 철이 동작을 멈추고 돌아서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잔뜩 철을 노려보았다.

제 집이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전날 밖에서 잔 것으로 모자라서 이모네까지 와서 시간을 축내는 것도 모자라서 태평하게 춤이나 추고 있는 것을 보니 실망스런 마음까지 들었다.

소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은 전날에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진지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참을 수 없는 화가 솟구친 소녀,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난, 오면 안돼?! 심부름 할 때만 와야 되는 거냐구! 니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언니 대접 받으려고 지랄이야!”

“뭐?!”

“진영이하고 호진이 나와! 이딴 곳에서 뭐 하러 있어?!”

제 성질에 못 이겨, 소녀는 영진언니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애꿎은 동생들에게도 화를 냈다. 누나의 말에 착한 동생들이 신발을 신고 나왔다.

소녀가 대문이 부서져라하고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누나...왜 화났어?”

진영이가 집에 와서 물었다. 묻는 말에 대꾸할 수 없는 소녀... 차마 동생에게 질투로 인해서 미칠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 집에 갈 거라는 통보를 내린 소녀가 동생들과 함께 tv앞에 앉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철이 들어왔다.

철은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신발을 벗지 않은 자세로 배로 깔고 엎드려서 방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화가 난 소녀는 그의 등장에 동요도 없이 tv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미야, 왜 화내고 나가니? 우리 같이 그곳에서 놀자.”

“싫어. 혼자서 실컷 영진 언니 앞에서 춤이나 추셔. 너랑 이제 상대도 안 해. 재수 없어.”

마음에도 없는 말이 화난 소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너...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녀, 속으로 찔끔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쁜 놈. 난 함부로 한 적 없거든? 아무 앞에서 춤이나 추는 너 같은 것, 정말 재수 없다구!”

소녀가 철을 돌아보며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철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몇 분 동안 말없이 소녀를 노려보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동생들은 왜 제 누나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철이 나가고 소녀가 제 방으로 들어가서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흘렸다. 남 때문에 울긴 처음인 소녀였다.

“나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