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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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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배가 고프다


BY 혜진엄마 2006-06-21


햇  장 익어 가는 냄새가 온  집안을 휘돈다
 
며칠 볕 좋은 곳에서  자글자글 끓였더니 
낟알이 풀어지고 삭아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는 향이다


쿰쿰하지 않고 고소하며 낟알 삭는 냄새가 진한걸 보니
맛있는 장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 기억의 서랍 칸 중 많은 칸을 차지하고 있는 칸이 있다
바로 굶주림의 기억이다


60년대 당시 세대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배고픔의 기억들 ..
모두 한마디씩은 할말이 있을 것이다


한끼 먹고

 다음날 종일 굶고
아침을 구경했다 싶으면 점심 저녁은 간 곳 없고


바깥에서 친구들이 놀자고 불러도 

허기진 다리로 일어 설 수가 없어


그냥 눈을 감고 시체처럼 몽롱하게 잠에 빠져 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사직전까지 주려본 나에게 먹는 일이란

삶의  신념이요 철학이요
목표가 되었을 정도다 지금까지 ...


처 죽이고 싶도록 미운 감정이나 

그 사람 아니면 살아갈 의미가 없는

절절한 사랑 놀음일지라도


창자가 등 짝과 맞붙을 정도로 굶어봐라 

그 딴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랑 할 일도 미워 이 갈릴 일도 

 배부른 담에 할 짓이고 

만들어 내고 찍어 낼   소설이란 말이지

 

잠깐만  내 얘기 하나 만 하고 ,

 

겨우 언문을 깨우친 나는 활자화 되어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읽어댔다


열다섯 살 때 대구 경산 친척집에 얹혀

더부살이 잠시 한 적 있었는데


당시 농촌 마을문고가 활성화되던 시기라 

저녁 설거지 마치자마자 논둑 길을 달려
책을 한 보따리 빌려 안고 와  

 

 하룻밤에 다섯 권 여섯 권을 촛불 밑에서 읽어치우곤 했다 

 

책을 빌리면

사인을 하는데 그 숫자가
일년에 300권을 읽었다던가 

그때 영남대학교 정외과 다니던  마을문고 회장 청년이 

 나에게
독후감을 부탁했는데  

 

정규 교육의 혜택이  없던 내 악필로다  

 섹스피어 4대 비극과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작품을 독후감으로 써냈더니 

그 해 경산 문화원 독후감 경연대회서 내 것이 일등이 돼기도 했다


지금도  시간만 나면  시립 도서관에 틀어박혀 산다
책을 손에 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나를, 내 처지를 잊게 해주는

아편 같은 작용을 책은 해주니까

 


배고픈 이야기나  마저 하자


하루는 이틀을 내리 굶고 

형제들끼리 누더기 속에  콩알처럼 나란히 늘어져 있는데

일주일만에 엄마가  분 냄새를 피우며 들어왔다


집구석이라고 모처럼 들어와 보니 

새끼들이 굶어서 눈도 뜨지 못하고 있지


그래도 인간이고 어미인데 어찌 맘이 심히?

아팠는지 어쨌는지     이 여편네 하는 짓 좀 보소


내 기억으로 그때가 저녁 해거름 무렵이었지 아마,   

 갑자기 작은 오빠를 일으켜 세우더니
엿 장사를 불러오라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냄비고 양재기고 풍로고 

풍로 불피우는 그 뭐시냐  (뱅뱅 돌며 생각이 안 난다)
그때는 고철이고 고물이고  다 돈이 되고  귀한 것인데  

 

이 철없는 여편네
이왕 살림살이 내다 팔려면 

근처 고물상에 가져가 돈으로 바꿔 쌀을 사서 밥을 해 먹이던가

집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살림살이를

죄 엿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뺑덕어미를 닮았는지 ..) 

 

오빠 나 동생들은  우선 먹을게 눈에 보이니 

허겁지겁  쭉쭉 빨며 기운을 차리긴 했지만 

문제는 그 날 밤 


밤늦게 자전거를 끌며 장사에 나갔던 울 아버지
집에   돌아와 보니


며칠만에 기어 들어온 여편네는 

아랫목에 돌아  누워 있고

 

뭐라도  끓여 아이들과 자신도  한술 뜨려고

쌀 봉지를 푸는데  이런!  솥이 있나 우그러진 냄비가 있나 

 

풍로가 있나  연탄집게가 있나  집구석이 휑 한 게 아닌가 

여편네야 본시  말이라도 붙일라 치면 

 촉새처럼 쏘아 대며 악이나 쓸 것이고 하여

 

그저  엿물이 입가에 번질번질한 

불쌍한 새끼들한테 사연을 듣자하니  

 

철없는 새끼들 제비새끼처럼 주둥이를 벌려 하는 말 

저 고마운 엄마가 간만에  집에 들어오셔서  

 

 엿을 한 뭉텡이 안겨줘서  맛나게 먹었는데 

 작은 오빠는  시키는 데로 솥이며 냄비며 그릇이며 풍로며 

구부러진 못까지 다 가져다주고

엿을 바꾸었다고 말했겠다


나이 차 많이 나는 철없고 자유분방한 여편네

잘못 얻은 죄로 

 

다섯 새끼들 맡아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굶는 날이 더 많은 당시 우리 형편이지만 

 

그래도 아버지 마저 우릴 몰라라 여기저기 

양딸이니 뭐니 갖다 버리지 않고 

끼고 살려 애쓰는 착한 울 아버지


그 날만은  화가 치밀어 아랫목에 

 누워 있는 엄마를 한 대 치더라


\"이 망할 ! 빌어 처 묵을 년아 !

그걸 다 엿 바꿔 먹으면   어쩌란 말이냐 하며  냅다 치더라 

 

세월이 흘러 우리 가슴에도 아버지 가슴에도 

엄마의 한 짓이 얼마나 황당했으면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 말 하셨고 

요즘은 아버지 기일 때면  우리끼리 그 때 일을 얘기한다


큰오빠는 엄마가 한 짓 중에 젤 어이없고 기막힌 일이라 혀를 찬다

 

이십 대 두 아이를 데리고 홀로 된 나


짜장면 한 그릇이 250원 하던  시절에 

거리로 내 몰린 나와 두 아이


그런데도 난  하나도  겁나지 않았고 

 두 아이도 네겐 짐이 되지 않았다


희망이 되었음 되었지


내가 심히 주렸을 적엔

난 너무 어렸고 어른들이 챙겨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어른이 아닌가   두 아이를 낳은 어미고


절대 내 아이들에게만은 

못 먹어 굶주리는 고통을 주지 않으라는 자신이 있었다 


난 여자이기  전에  새끼를 둔 어미고 

도둑질 빼곤 무슨 짓인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짓 인들..  굶는 일만큼은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여자라서  조금은 쉽게  형편이 펴지고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었던 건
여자라는 성의  입지도  컷을 것이다


내 아버지가 남자 몸으로  다섯을 키워내며  겪었던 

그 비참한  궁핍이 남자여서?

 

우리사회가 그 때나 지금이나 

 홀로 된 여자보다 홀로 된 남자가 더  

살기 어렵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속담에도 과부 집엔  쌀이 서말 

홀아비 집엔  이가 서말 하잖은가


어느 땐  내 입장에서   오히려 울 아버지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


평생을 일 속에 살았으면서 

왜 우리 형제를 그토록 주리게 했을까? 하는 ..


거기에는  나 또한  혼자 아이들과 사는데 

교육 환경  정서까지  알콩달콩  신경쓰며
살아 왔건만

 

 울 아버지는 어째  교육은커녕  

 세끼 밥도  못 챙겼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 ..

내 모자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쌍하고 가련한 그리고 자랑스런 울 아버지


굶겼을망정  매질은 아니하였고

 교육은 엄두도 못 내어 자식들에게 평생 배움의 한을
심어주었지만 

 

자식을 멀리 오래 낮선 곳에 두지도 않으셨고 

말 한마디를 하셔도  사람의 도리에 대해서  조근조근 타일러  

인성교육을 시켰던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징용이다 뭐다 해서 

배움이 없었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한자 실력이 대단하셨고 


홀로 거리 간판을 보며 배웠다는 언문으로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으니 

그것 또한 우리에게 산 교육이 아니고 뭐 겠는가


난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객지인

이곳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밤이면 물이 흐르는  생선지게를 져 나르고

새벽녘에 돌아와서 

 바소쿠리에 붙어온 생선 잔챙이로 국을 끓여 먹곤

 

다시
철광 굴에 일나가는  고된 나날 중에도 

잠시 잠깐 시간만 나면  길거리에서 주워온 신문 쪼가리나

어디서 빌려온 낡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며 컸다

 

책이 귀했던 시절 뭐든 읽을 거리만 있음 

진창에 빠진 거라도 건져내어
행궈 읽었던 그 때,


보리밥과 왜 간장 한 종지만 있어도 달게 먹었고 

그리고  눈앞에 읽을거리까지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그 시절


그 시절 내 간절한 소망은  맛있는 것과  읽을 책이 있는 삶


내 앞날에  행복은  오직  한가지 

맛있는 것 실컷 먹은 다음엔
재미있는 책 켜켜로 쌓아놓고  읽으며  살아가는 것

 

 

꿈은 이루어졌다


시방 난 그러고 산다   

얼마든지.. 언제까지나  무한정 읽을 책들과


온갖 양념과 음식 재료들로 꽉 찬 큰 냉장고안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도  바로  먹을 수 있고


기뻐도 먹고, 슬퍼도 먹고,

 화나고, 불안해도 위만 채우면  치료되는 온갖 먹을거리가
쌓여있다 

 

물론 떨어지면 당장 달려가  보따리 보따리 사 들고 올   돈도 있다

 

내 무엇을 더 소망하랴


그런데도   인간이란 원래가

 탐욕스럽고도   멈출 줄 모르는  욕망 덩어리로  된

물건인지라    

 

늘  뭔가 부족하고  뭔가에 허기가 진 듯하다


밥으로도 안 되는 이놈의  지랄 맞은 헛헛 증은

 이렇게 잡문이나마 끄적거리다 보면  간혹  채워질 때도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