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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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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강원도에 다 있다(1)


BY 개망초꽃 2006-06-16

“봄이면 진달래가 온 산 가득이었어. 종미야? 냇가에 패랭이꽃이 얼마나 많았는 줄 아니? 난 잊을수가 없단다. 내 추억은 강원도에 다 있다.”

“네, 지금은 패랭이꽃이 다 사라졌어요. 산고갯길에 피어 있던 주홍빛의 나리꽃과 보랏빛 도라지꽃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져요.”

“그래, 너네 엄마 고향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을 땐 힘들었지만 그때 본 꽃 하나하나를 잊을 수가 없다. 네 아버지를 묻어둔 강원도 산골이지만.......”

작은 아버지는 눈물 때문에 목이 메여와 다음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도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 음식그릇과 엉켜있던 휴지통을 찾아야 했다.

“며칠전에 하도 그리워 강원도에 갔다왔다. 들꽃이 많던 냇가, 너네 엄마네 집, 느티나무 주변을 한바퀴 돌고 왔지. 옛날에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마을이 작고 조용하더구나. 내 추억은 강원도에 다 있단다.”


지난 토요일,작은 아버지의 환갑이었다. 오랜만에 친가쪽 식구들이 다 모여들었다. 십년만에 본 친척도 있고, 머리들이 희끗하고 세월만큼 늘어난 주름 웃음으로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작은 아버지의 꼿꼿했던 성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눈물까지 흘리시며 추억을 되짚으셨다. 집안에서 제일 큰딸인 나를 보고, 나도 작은아버지와 같은 유년시절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런지 작은 아버지는 나에게 자꾸자꾸 강원도 꽃이야기를 하셨다. 나이가 들어가면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작은아버지는 지난날을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계셨다.


나의 아버지에겐 삼형제가 계셨다. 아버지가 큰아들이었고 밑으로 남동생이 둘, 큰동생은 어릴적부터 혼자 떨어져 객지생활을 해서 형제들과의 추억이 별로 없었지만, 막내였던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와 함께 어린날과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친할아버지와 할머니 두분은 작은 아버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셔서 사실상 작은 아버지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를 거두지 않았다면 작은 아버지는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는데,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아버진 직업군인이셨다. 나의 어머니를 만나신건 어머니의 고향  강원도 산고개밑 초소에서 근무를 하시다가 어머니의 아버지가 먼저 마음에 들어서 셋째딸과 결혼을 시켰다. 그때 아버지에겐 중학생이었던 작은아버지가 딸려 있었고, 그림자 작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어린시절을 많이 보내게 되었다. 부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 어린 동생이 딸린 아버지를 어머니의 어머니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위라서 미워 할 수가 없었지만 외할머니는 작은 아버지를 눈꼴이 시도록 미워하셔서 밥을 펴도 꽁보리밥만 퍼 주셨고,구박을 많이 하셨다고 작은 아버지는 나를 만날때마다 얘기를 하셨지만 지금은 그 외할머니가 밉지 않고 보고싶다고 하셨다. 그때는 너도나도 가난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작은 아버지는 이해를 하셨고, 유년시절로 되감기를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일찍 부모님을 잃게 되어서 제각각 홀로 일어서야만 했다. 아버지는 직업을 군인으로 잡으시면서 작은 아버지를 군대 안에서 키우셨다. 작은 아버지는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전교 일등을 놓쳐 본적이 없고, 공채로 대림산업에 들어가 정년까지 직장 생활을 하셨다. 겉으로 보이는 작은 아버지는 냉랭해 보이는 분이시다. 조각같이 생긴 얼굴에 말 수도 적고 어린시절의 아픔이 많으신 분이라서 술을 드시면 되씹기 신세 한탄을 하셔서 작은 어머니는 또 시작이네, 하시며 듣기 싫어 하셨다.


환갑이 되신 작은 아버지의 머리카락는 풋옥수수 수염같았다. 집안에서 작은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신성일처럼 잘생긴 분이라 명명하셨던 작은 아버지 얼굴은 검버섯이 바위이끼처럼 피어나고, 주름이 밭고랑이었다. 친할아버지는 자식을 낳을때마다 아들만 내리 아홉을 낳으셔서 딸 딸 하시다 돌아 가셨다.  아들 여섯을 어릴적에 잃고, 나의 아버지도 33살때 요절을 하셨다. 그래서 친가쪽은 작은아버지 두 분만 살아 계시고 아무도 없다. 그리고 딸이 귀한 집안이라 첫딸인 나를 낳고 집안에서 경사났다고 좋아들 하셨단다. 나는 아버지 사랑과 작은아버지 사랑을 단비처럼 달게 먹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애기였던 나를 여자는 다리가 날씬해야 한다며 매일 다리를 주물러 주어서 지금 내 다리가 가늘고 길다고 친척들은 황새다리라고 놀리곤한다. 자상하고 정이 많았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때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며칠전에 아버진 나를 끌어안고 우리 딸, 우리딸, 하시며 구슬피 우셨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단상은 눈물 흘리던 그 모습으로 남아 영원이 내 가슴속에 매듭져 있다.


작은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부모처럼 존경하고 의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 아니였음 지금의 내가 없었을 거라고 하시며, 형수인 우리 어머니에게도 고생 많았다고 고마웠다고 어깨를 끌어안아 주셨다. 28살에 홀로 된 나의 어머니, 33살에 세상것 털고 가실 수 없었지만 어쩔수 없이 가신 나의 아버지. 홀로 남겨진 살아 있는 식구들의 고생이야 어찌 다 말 할 수 있겠냐만은, 살아 있는 사람은 살게 돼 있다고 우리는 무너진 돌담의 호박덩이처럼 살아냈다. 작은 아버지는 학창시절을 어머니의 고향 강원도를 왔다갔다 하시며 보내셨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작은 아버지의 첫대면은 중학생 모자를 쓰고 아버지 앞에서 작달막한 것이 당당하게 걸어 왔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는 어릴적에 작은편이었고 아버지는 백팔십의 장신이라서 더 작아 보였을 것이다. 지금의 작은 아버지는 크신편이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을 하면서 원하지 않던 어린 시동생이 딸려왔고, 아버지는 어머니보다는 동생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월급을 타면 동생쓸 학비와 용돈을 먼저 빼 놓았다고 하니 속터지는 어머니 심정을 아버진 모르시고 돌아가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