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 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러운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조병화님의 시 \"초상\"의 전문입니다.
바다에 가면 저도 모르게 행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쁜 조약돌만 보면 주머니에 집어넣는..
때로 사람에겐 사진 한 컷만큼의
짧은 순간에 박힌 어떤 기억이
은연중에 삶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래톱으로 밀려온 파도가
저녁 노을이 붉게 적셔놓은 새털의 흔적처럼
고운 물결만 남기진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애,
처음으로 배정된 교실에서 은색 테를 두른 안경이 잘 어울렸던.
서로가 대각선으로 앉아 어쩌다 그 애가 등돌릴 때면
묘하게도 시선이 얽히던 아이.
아버지의 직업이 장학사라는 근사한 명함을 가진만큼
똑 부러지게 공부 잘하던 하얀 피부의 아이.
그 애를 둘러 싼 모든 것이
반짝이는 보석을 단 듯 빛을 발했고
그 빛의 반경만큼이나 덩달아 부피를 더하던 부러움 뒤로
보이지 않는 무게가 되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던 어떤 울분섞인 서러움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인간관계인가 봅니다.
엄마가 늘 제게 하시던 말씀이
\" 넌 부모 복은 없어도 살면서 인복은 늘상 따라 다닌단다.\"
말이 씨가 되는 건지..
청하지도 않은 손을 내밀어 늘 내 곁에서
티 안내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따뜻하게 맴돌던 그 아이..
한창 \"마니또\"라는 비밀 친구가 유행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밤이면 무수한 쪽지 편지를 깨알같이 박아
다음 날 책갈피에 슬쩍 밀어 넣던 설레임의 대상이었고
이성을 알기 이전에 느낀 어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대화들...
그러던 그 애의 행복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그 애의 아버지가 신문의 지면 한쪽을 장식하며 먼 세상으로 가시고
모든 것을 정리한 그 애의 엄마는 막다른 길목에서
친정 쪽 식구가 많은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해 버렸지요.
떠나기 얼마 전
강릉에 살면서도 몇 년 만에 그 애와 단둘이서
송정행 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바닷가.
송정에서 경포까지 긴 해안길을 따라 걸으며
안경알에 들어 차는 습기를 감추려
자꾸만 엎드려 골라낸 조약돌을 내게 건네던 그 애.
끝없이 밀려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가슴이 뽀개지는 것처럼 아프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해독하기 모호한 암호같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 하면서 겨우겨우 비밀처럼 입력했던 어떤 시점.
가방 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간 터라
양쪽 주머니가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하면서도
행여나 흘릴 새라 꼭꼭 받아들었던 그 많은 조약돌들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그렇게 돌로 대신했던 것인지..
책상 위에 졸조르르 늘어놓고
청승스러움을 앞세운 엄마의 온갖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반질반질 자리를 지켜내던 그 돌들도
세월 속에서 조금씩 먼지를 뒤집어쓰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잊고 산 듯 살다가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거나
혼자서 바다를 찾을 때면
오뚝이처럼 그녀가 톡 튀어나와
부서지는 파도 위에 끝없는 발걸음을 놓게 합니다.
그 옛날 고개를 맞대고
\"히야~~있지, 이 시 몸서리치게 감동적이다..그치..그치?\"
하던 우리 푸른 시간들의 초상을 들고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