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이맘때면 이곳저곳에서 담 벽을 타고 줄기 뻗는 붉은 들장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타는 빨강 장미~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 그 강력한 색깔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초등학교 때쯤이라 생각한다.
[들장미소녀 캔디]란 만화 프로는 내가 죽고못사는 만화영화였다. 일요일 아침 9시쯤 하던 그 방송시간만 되면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모두 해소되는 것 같았다.
말괄량이지만 의리파 여걸, 속으로 울되 겉으로 눈물을 삼키는 캔디는 나의 우상이었다.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또 어떻고...
늘 따뜻한 미소와 포근한 마음의 안쏘니... 언제나 캔디 곁에서 사랑으로 감싸줄 것 같던 그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던 난, 테리우스가 나타날 때까지 우울하게 지내야 할 정도였다.
캔디의 단짝 친구 애니와 함께 자란 포니의 집과 못된 성격의 이라이저와 니일 남매며, 캔디의 꿈속에서 나타나서 휘장을 건네줬던 알버트의 마니또같은 사랑까지. 지금까지 생생한 그 이야기를 쓴 <미즈키 코요코>가 한때 존경스럽기까지 했었다.
왜 캔디를 들장미에 비유했을까... 버려진 듯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홀로 잘 자라며 화려한 꽃을 피우는 들장미의 특성과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해쳐나가는 캔디의 인생이 비슷해서....
어쨌거나 난 그 만화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들장미가 만계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감상에 젖곤 한다.
그 옛날 난 기필코 남자를 만난다면 인물은 기본이요, 안소니처럼 부와 함께 사랑이 가득하거나 테리우스처럼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카리스마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짬뽕한 것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더 좋고...
그런데 내가 만난 남자는,
안소니 감도 아니오, 테리우스는 더더욱 아니오, 오히려 심통 부릴 때면 이라이저와 남매인 니일처럼 술 먹고 들어와서 사람 혈압이나 올리는 남자란 것.
여자는 자고로 남자의 품에 살포시 안길만큼 호리호리 해야 한다더니, 하루 2끼에서 3끼, 그것도 한 그릇을 좀체로 넘기지 않는구먼서도... 나의 몸은 어째 나날이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좁은지도 모르고 옆으로만 퍼지고 그것도 모자라서 뱃살은 바닥을 빗자루 질을 하려는 건지...
반대로 하루 3시 3끼 두 공기씩도 모자라서 야참까지 챙겨 먹는 내 낭군은 키 173cm에 허리 32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날 감싸 안지 못하는 남편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남편의 흉을 꼬집자면,
아내를 향한 포용력을 휴지통에 집어 넣었다손처더라도 겁은 또 어찌나 많은지,
남편이 지금껏 나에 대한 모험담을 늘어놓을 때, 빼 놓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이 사람은 아빈이를 뱃속에 넣고도 놀이공원에 있는 기구란 기구는 자유이용권 끊어서 2~3번은 반복적으로 타던 사람이라고...” 라고.
남편이 지금껏 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내게 맺힌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부부가 함께 놀이 공원에 갔으면 함께 타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내 낭군은 자기 마누라를 혼자 타게 하거나 모르는 사람과 동승하는 것을 보고도 저만큼 떨어져서 태연하게 손만 흔들고 있었단 말씀. 그것이 슬슬 심통이 나기 시작한 나는,
“자기 나 사랑하면 저것 꼭 같이 타야해.” 하고 겁 많은 남편에게 졸랐다.
마지못한 눈치였지만 전라도 사나이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그까이것~” 하고는 기세 좋게 내 손을 잡고 바이킹에 올라탔다. 난 제대로 스릴을 느끼고 싶어서 자리도 맨 뒷자리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작동하는 기구,
“워메~, 워메~ 뭐 이런 것이 다 있어!!! 사람 잡네...” 남편의 그 소리는 기구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 모습이 난 어찌나 웃기던지 바이킹 타는 내내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놀이기구에서 내려온 남편 왈,
“우황청심환 먹어야겠다. 팔 다리에 잔뜩 힘을 줬더니 후들거려... 얼른 집에 가자. 자기도 뱃속에 아기 생각해서 그만 타.” 하는 거다.
“내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지, 앞이 깜깜해.”
제대로 맥빠진 나의 한마디였다.
그뿐 아니다. 어느 장마철, 번개가 무섭게 때리던 날.
“아빈 엄마 무서워~!” 하고 젖 빨다가 잠이든 아빈이를 밀쳐내고는 내 품으로 들어오던 남편이다.
드라마에선 그런 상황이 되면 여자가 “자기야, 나 무서워.” 하던데, 이건 완전 반대다.
“괜찮아. 그깟 번개가 뭐가 무서워. 그냥 자.”
아빈이와 함께 남편을 다독거리면서 다시 한번 내 앞날이 훤히 보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난 무드 넘치는 안소니와 한 박력하는 테리우스와는 아무 상관없는 남자를 만났다. 내 남편 역시 소시적에 오드리햅번의 청순함과 마릴린 먼로의 섹시함과 비비안 리의 도도함으로 갖춰진 여인을 꿈꿨을 지도 모른다.
그만그만해서 콩깍지가 끼어 사랑을 했고 보지 못했던 서로의 단점들로 실망을 했고 힘든 세월 함께하며 기댈 수 있는 것은 둘 뿐이란 것을 알아가면서 가끔은 남편이 따뜻한 안소니로 보였다가 믿음직한 테리우스로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난 지금처럼 들장미가 붉게 피어오를 때면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외로워도 슬퍼도,
힘들고 고달퍼도,
앞날이 막막해도,
나는 안 울어 참고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를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뭐라고 쓰적거렸는지 오늘은 더욱 두서가 없는 글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