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전에 없이 전화가 자주 온다.
내 평생에 당첨과는 거리가 먼 줄 아는데
무슨 조사 기관에서 무작위로 뽑는 번호로는
우리집 전화번호가 꽤 좋은 모양이다.
볼 일이 급할 때이거나 분주한 척 하는 중일 때에는
사실 그런 전화가 달갑지가 않다.
하여,적당한 이유를 달아 친절한 물음을 회피한다.
전화번호에 당첨된 기분으로 적극 협조를 해야 되는데
그게, 그러니까,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요즘 외출이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가방 속에 혹은 옷 주머니 속에 명함 몇 장은 담아 온다.
얼굴도 이름도 생소한 양반들이 최대한 선하고 좋은 인상을 주려는 듯
일류 사진 작가님의 솜씨가 깃든 얼굴을 들이댄 명함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오늘 버스 정류장 앞에서 받은 첫 명함의 주인공은 젊은 남자다.
앞으로 우리 동네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공약은 듣지 못했지만
인상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인상 좋은 것이란 인물 난 것이랑은 다르겠지만..
건널목에서 만난 또 한 사람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의 명함이다.
본인은 아니고 그 가족이거나 친인척이거나 그럴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고 그냥 지나친다.
거리에서 나눠주는 가게 전단지 하나도 다 챙겨 받는 내가
내미는 하얀 손을 거절 할 수가 없어 또 받았다.
-전단지도 잘 받으면 사탕이나 포스트 잇이나 볼펜이 딸려 있는 수도 있다.-
여덟명이 모인 자리가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여자 두 사람이
공손히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차 한 잔과 잘라놓은 빵 한 조각을 건냈으나
극구 거절하며 내민것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 그림으로 오늘의 세번째 명함이었다.
찾아온 젊은 여자는 명함 속 남자의 세째 딸이며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의 내자라고 소개 하였다.
하도 세째딸임을 강조해서 눈치없이 자세히 쳐다보니
소문난 최진사댁 세째딸 처럼 이쁜 얼굴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는 간곡한 인사에 이어
그녀의 어머니 되시는 분의 말씀이
딸 넷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무슨 박사이고
작은 아들은 의대생인데 키가 몇센티이고 눈이 어떻게 생겼다며
중증의 고슴도치 병에 도취되더니
딸들도 다 잘 되어서 자식 농사는 잘 지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아
지금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헷갈렸다.
잘 지은 자식 농사에 이제 남편이 의원만 되면
그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인생인 셈인가.
한참 자식 자랑을 더 늘어놓더니 나중엔 본인은 자식을 많이 낳아서
이 나라 출산장려에 일조를 했다는 말로 끝나는가 했더니
남편을 잘 부탁한다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두 여자(?)가 나가고 나니,울엄마가 잘 쓰던 말,
열 나라가 자는 것 같았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홀짝 넘긴 녹차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 가는 소리까지 들켜버렸다.
\"참,, 비호감이네..\"
참을만큼 참았다는 듯 누군가 한마디 던졌다.
\"자식 이야기 그거 안 하는 것이 나을 뻔 했어.\"
\"그러게 그건 결혼정보회사에 가서나 할 이야기 아니야?\"
\"남편 선거 운동 하러 왔으면 그 임무나 하지..\"
사람 여럿 모인 자리에서 가장 유의해야 몇 가지가
서로 견해를 달리 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했다.
토론이 가능한 자리이면 모르되,
그렇지 못한 자리에서는 간혹 불상사가 생겨
좋은 관계가 무너지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단다.
정치적인 것에 관심도 없거니와 아는 것도 없어서
나는 식은 녹차만 꼴깍 거리고
몇 사람은 이번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남은 볼 일은 은행에 가는 일이었다.
은행 문 앞에 아주 어색한 몸짓의 인사를 하는 노신사가 있었다.
생활반경이 좁은 내가 아는 남자 얼굴이란
동네 슈퍼와 세탁소 사장님과 그외 몇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은행 문 앞에 서 있는 아저씨가 낯설지 않았다.
어데서 봤나? 은행지점장이신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낮고 묵직한 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파란색 명함을 한 장 내민다.
안 받으면 서운할까봐 또 받았다.
은행 안 출금 기계 앞에서 명함을 보니
헛~좀 전에 만난 두 여인의 아버지자 남편이시다.
명함 속의 얼굴과 약간 다르다.
실물이 훨 부드럽고 인자해 뵌다.
은행에서 나오는 내게 또 명함을 건낸다.
받았다는 증거로 손에 쥔 명함을 보이며
이젠 얼굴을 확실히 쳐다봤다.
아~아무래도 내 눈엔 안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래도 자식 농사 잘 지었다니 내 눈이 노안임을 감안하자.
오늘 만난 세 사람 중에서 뽑아야 되는건지
내가 모르는 후보자가 더 있는지
내가 찍어야 되는 투표 용지가 몇 개나 되는지
보름 전으로 다가온 투표에 대해서 아는게 너무 없다.
뉴스도 좀 보고 귀동냥이라도 해야겠다.
어떤 사람이 어떤 공약으로 우리 동네 머슴을 자청할 지 모르겠으나
누가 되더라도 공약이 공염불이 되지만 않는다면
올해의 내 한 표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선거 때만 머리 조아리지 말고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주민을 우러르는 밀알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의원님!!열심히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