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가까운 시간에 또다시 옆집에서 난리가 났다. 20도를 웃도는 날씨 탓에 다들 창문을 열고 사니, 그 소리의 위력은 말할 것도 없이 대단했다.
아줌마의 큰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저씨가 나가는 것 같았다.
남에 일에 쥐새끼처럼 몰래 엿듣고 싶지 않은 나였지만 영상까지 그려질 만큼 똑똑하고도 큰소리로 들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저씨가 나간 후 전화 통화로 싸우는지 얼마동안 큰소리는 계속됐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아이들에게 하는 신경질 적인 말소리가 이어졌다.
아줌마와 내가 한 건물에 산 것이 벌써 2년이 넘어가는데 우리가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신의 치부일 수 도 있는 속엣 말을 아줌마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놔준 순간부터 난 그 분이 정이 참으로 많고 남에게 피해주며 살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아줌마에 대해서 갖고 있던 오해를 말끔히 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람은 서로 알기 전에는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돈에 채이고 아이들에 채이고 남편에게 채여도 혼자서 집 밖을 나서지 않고 집안에서만 틀어 박혀있는 그분은 늘 마음이 외로운 것 같았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간직하며 살아간다지만, 최악에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 어린 자식들의 족쇄까지... 내 눈에 비친 그분은 그래서 남들보다 더 큰 외로움을 지니고 사시는 분으로 보여 졌다. 그러니 아저씨에게 퍼붓는 것이고 아이들에게 쏘아 될 수밖에...
남자들도 밖에서 힘들겠지만 집안에서 아이들과 24시간 씨름하며 처박혀있는 여자들의 스트레스를 이해하고 받아 주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아줌마가 퍼붓는 화를 모두 듣지 않고 보통의 남자처럼 아저씨가 나가버렸으니 아줌마의 입장에선 화를 터트린 순간보다 더한 분노와 배신감을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누군가 술 좋아하는 내게 누룽지 술이라는, 요구르트 색처럼 노란 막걸리를 pt병으로 하나 가득 담아서 갔다가 준 적이 있었다. 그동안 두 사발 정도 먹고 남은 것이 반 이상 남아있었다.
나는 문득 그 막걸리와 함께 아줌마의 하소연을 들어줄 상대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줌마 입장에선 만사가 귀찮아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옆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옆집이에요.”
“아...네. 미안해요. 시끄러워서...”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러시네~ 내가 지금 무진장 술이 고픈데 한 잔 하면 어떨까요? 우리 집에 좋은 막걸 리가 있거든요.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이면 기다릴 수 있으니까 끝나면 전화주시던가요.”
“하하하하...싸움은 끝도 없지요. 하지만 지금 와줘도 되는데.”
나는 한 손에는 시원하게 냉기를 머금은 막걸리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안주 없어서 걱정할까 고추참치 하나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현관문 열고 6발짝 걸어가니 옆집에 당도했다.
“속상해서........”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줌마는 어쩌다가 싸우게 됐는지 쏟아놓기 시작했다. 문제의 핵심은 늘, 돈... 얄미운 돈...
내가 상에 막걸리와 참치 캔을 올려놓으니 막걸리에는 김치가 제 맛이라며 김치를 쓸어 내었다. 김치를 쓸어 담으면서도 아직 분이 체 가시지 않은 아줌마는 콧바람을 씽씽거리며 계속해서 속상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올려놓는 김치.
“어떻게, 대접이 없으면 우리 빨대라도 꼽아서 사이좋게 마실까요?”
따라 마실 대접을 주지 않기에 한 나의 말에 다시 아줌마는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리곤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하며 사발 두 개를 내려놓았다.
“그렇죠. 막걸리를 먹자니, 안주는 손으로 집어 먹어야 제 맛일 거예요. 참치도 손으로 집어서 먹고 손가락 쪽쪽 빨아서 먹으면 괜찮겠다.”
젓가락을 주지 않기에 다시 한번 던진 말에 아줌마는 배꼽이 떨어질 정도로 웃어댔다. 그리곤 젓가락을 하나만 놓고 자리에 앉았다.
“젓가락 하나로 사이좋게 먹고 싶구나? 아휴~ 저를 너무 사랑하시는 거 아니에요?”
왜 아줌마의 젓가락이 없느냐는 말이었다. 웃음으로 죽기 진전이 되어 버린 분은 금세 얼굴이 밝아 지셨다. 내가 들어선 것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우리는 사이좋게(?) 두 사발씩 나눠마셨다. 달짝지근한 막걸리와 묵은지와 참치의 조화로운 맛을 느끼며 이야기꽃을 피워댔다.
막걸리 한잔을 따라놓고 건배를 몇 번씩 했는지 모른다. 어떤 술을 막론하고 대접이던 글라스든 원샷 아니면 상대(?) 안하는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줌마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누구랑 얘기하지 않으면 애들만 잡고 있었을 거라고... 내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오지랖 넓은 짓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빈엄마~ 있어?!”
우리들의 대화중에 아래층에서 80을 바라보시는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있어요.”
“우리 오늘 청소 좀 하자!”
“에궁... 할머니 내일 하면 안 될까요?”
얼마 전에 청소를 했건만. 며칠 전, 건물 안에 페인트칠을 하는 대대적인 일이 있었다. 그래서 페인트 냄새와 구석구석 공사의 흔적이 남아있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건만 할머니께서 먼저 말씀하시니 젊은 나는 죄송했다. 하지만 마시던 막걸리가 남아있는 아쉬운 마음에 선뜻 ‘네!!! 청소 해야죠.’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오늘 하지.”
고집스런 할머니의 말씀에 난,
“그래요. 할머니. 30분만 시간 주세요. 아래 치울 것 치우시고 들어가 계세요. 제가 후딱 쓸고 물 껸질게요.”
나의 말에 할머니는 알았다며 아래 있는 물건들을 치우셨다.
“매일 아빈엄마가 청소해서 어떡해요. 내가 한다한다 하면서도 이래저래 선수를 뺏겨서...매일 미안하다는 소리만 달고 사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이들도 어린데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면서 젊은 제가 해야죠. 그리고 나 혼자 착한 일하고 복도 혼자만 무지 많이 받고 살려구요.”
“나도 젊어요. 33살인데...”
속에 쌓인 먼지 같은 마음들을 쏟아낸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하는 아줌마의 얼굴이 무척이나 환했다.
“헉...그럼 전 23살 할래요.”
나의 말에 또다시 까르르 웃는 아줌마... 그 놈의 삶이 여유롭다면 분명 우리는 그렇게 여유로운 웃음만 머금으며 살 수 있을 텐데... 6살 터울이 지니 말을 편하게 내리라고 말해도 어쩐지 내게는 함부로 말을 놓을 수가 없단다.
그럼 아직도 제가 불편한 거군요~ 너스레를 떨었더니 그건 절대 아니라며 또다시 웃었다.
“우리가 분명 이렇게 힘든 일을 겪고 살고 있으니 후에 생활이 펴지더라도 힘들게 사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돈 주고도 배우지 못할 것을 배우며 사는 거라고 생각하자구요.”
청소를 해야 하니 마지막 남은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 아줌마께 말했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얘기처럼, 내가 오늘은 아줌마를 위로하고 있지만 내일이나 모래는 내가 다시 밴댕이 속알 딱지처럼 굴지도 모르니 그땐 아줌마가 위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화나면 까짓거 그렇게 큰소리라도 터트리고 살라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살림 속에 남들은 자식새끼 버리고도 사는데 우린 성질 낼 것 내면서도 내 할 일은 다하고 사니까 당연히 그럴 권리는 있다고도 말했다.
남의 흉은 3일이란 얘기가 있다고, 남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3일이면 그 일 잊고 다른 얘깃거리 찾는다니 남의 눈치 크게 보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면 창문을 모두 닫는 센스를 보여주자고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의 뒤를 따라서 아줌마도 나와서 청소를 거들었다. 늘 혼자 하던 청소였건만 여럿이 하니 시간은 확실하게 절약이 되었다.
2% 부족한 알콜수치, 더 마시고 싶었지만 쇠주로 짬뽕하고 다음날 머리 깨질 고통이 걱정되어 참았다. 그래서 2차는 우리 집으로 건너와 녹차를 마셨다.
앉아있는 잠깐 동안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고 남동생에게 전화가 오니 내가 참으로 부럽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줌마가 돌아가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역시나 혀가 살짝 말린 목소리로,
“아빈엄마~ 오늘 엑셀 깔았더니 허리가 무지 아프네.”
“그래서, 아픈 허리 달래느라 술 마시고 있었어? 매일 피곤하다는 사람이 일찍 들어와서 쉴 생각 안고?”
“친구가 삼겹살에 술 한 잔 사주니까 그거해서 한잔하고 있지.”
“술은 조금만 먹고 삼겹살만 많이 먹어. 그리고 내일 생각해서 일찍 들어오고.”
“알았어. 사랑해.”
“그 놈의 4랑은 어째 늘 발전이 없냐? 다음부터는 ‘5랑해’ 라고 해.”
“하여튼, 여편네 말은...”
남에겐 살가운 내가 어째 남편에겐 그렇게 무뚝뚝한지 모르겠다. 일찍 들어오라는 마누라 말에 언제나 ‘알았어’ 하고 대답 하나 만큼은 잘하는 내 남편... 새벽 1시가 다 되어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12시를 넘겼으니 외박이라고 따지고 들며 싸웠을 텐데... 남들과 대화를 하며 보고 들으며 배운 탓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나를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