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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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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1


BY 일상 속에서 2006-05-11

 

 

 

7형제의 5째인 남편. 그래서 내게는 시 조카가 참으로 많다. 난 조카들에게 용돈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못난 작은 엄마이며 큰 엄마다.


 

동서 간에 통화하다 보면 왜 이리 사는 것이 힘이 드느냐고 전화통화중에 죽는 소리 안하는 사람이 없다. 사는 게 모두 그러려니... 서로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크게 헐뜯으며 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의 바로 위에 4째 시숙님은 몇 년 전에 마음 맞는 분을 만나서 새 가정을 꾸리고 그 사이에서 딸을 하나 낳았다. 그 좋은 일에도 난 진심으로 축하해준 적이 없다.


4째 시숙님은 내가 처음 살림을 차렸을 때 이웃에서 살고 계셨다. 내가 큰 아이를 낳았을 때 4째 형님(큰동서)은 7개월의 임부였다. 2살짜리 딸도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다혜...다.


계집애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산만하게 나대던 그 것이 갓난아이인 내 아들 아빈이 곁에서 자꾸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되는 바람에 간담이 서늘하기도 여럿이었다. 컵이나 차 주전자를 깨는 것은 기본이었다. 4째 형님은 가까이 사는 내게 다녀가지 않으면 할 도리를 못한다는 찜찜한 생각을 하셨는지 이틀이 멀다하고 다녀가셨지만 나는 죽을 맛이었다.


 

아빈이를 낳고 일주일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새벽이었다. 요란한 전화 소리에 전화를 받으니 곁에 사시는 3째 시숙님 이셨다. 4째 형님이 산달이 멀었는데 하혈을 하시고 의식을 잃어 병원에 입원 하셨다는 연락을 주셨다.


 

남편이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고 중간중간, 걱정하는 나를 위해 집으로 연락을 줬다. 형님의 하혈은 멈추지 않아서 계속 수혈 중인데 피가 모자란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형님은 7개월 된 아이를 낳으셨단다. 가슴 아프게도 아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폐도 기형이었고 항문도 없는 아이로, 인공호흡기를 착용해도 일주일을 넘기기 어렵다며 병원 측에서 안락사를 권했단다.


아기를 낳고 3,7일이 지나지 않은 나는, 그래서 가려야 할 것도 많았다. 그래서 병원으로 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마음에 준비를 하랬다는 소리를 듣고 병원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본 형님의 모습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온 몸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 역시 아빈이를 낳을 때 하혈을 많이 해서 병원이 발칵 뒤집어 졌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형님의 모습을 보니 뒤늦은 실감이 들었다. 그나마 탈 없이 아이와 건강히 퇴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것이 형님을 보는 마지막일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 왔는데 기적인지 불행인지 형님은 깨어나셨다. 하혈도 점점 멈췄다고 했다. 하지만 형님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정신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1초 전에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보이지 않으니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조카 다혜는 이모 집에 맡기어졌다. 문제는 형님. 병원비로 들어간 돈이 만만치 않았으니 먹고 살려면 시숙님은 일을 나가셔야 했다. 하지만 형님을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가까이 있는 것이 죄(?)라고 4째 형님은 3째 형님 댁으로 출퇴근을 하게 됐다. 3째 형님은 간간히 내게 전화를 해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했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형님 때문에 못살겠다고 넋두리를 하셨다. 닦지 않아서 냄새도 장난이 아니라고 하셨다.


 

“동서, 다혜 엄마가 동서네 가고 싶다고 하는데...”


24살의 철부지 새댁인 나는 형님의 속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그 말에 그럼 며칠씩 나눠서 돌봐 드리자고 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지하 단칸방에서 살던 나는 형님을 모셔야만했다. 냄새나는 몸을 닦아 드리고 머리를 감겨드리고, 하셨던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셔도 말상대를 해드렸다.


아빈이가 울고 보채도 형님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것이 우선이었다. 다리 힘마저 잃으면 안된다길래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유모차 손잡이에 형님의 손을 올려놓고 몸의 중심을 잡게 한 후, 동네를 한 바퀴씩 돌기도 했다.


 

형님이 늦은 저녁 돌아가고 나면 그때서 힘들다고 얼마나 울어 됐는지 모른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시숙님은 결단을 내리셨다. 서울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해남의 시댁으로 내려가서 살기로. 그래서 형님은 다혜와 함께 시어머님과 살게 되었다.


1년이면 두어번 내려갔던 난, 형님과 다혜가 까마귀의 ‘형님’을 하고도 남을 만큼 지저분해져 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그때만 해도 초가집에 열악한 환경으로 늙으신 시어머님이 밭으로 들로 돌아다니기 바쁘시니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었다.


형님은 그렇게 8~9년을 더 사셨다. 점점 눈의 시력이 돌아온다고 하셨지만 정상은 될 수 없었다. 정신도 많이 좋아지셨는지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도 줄어들었다. 뭔 때가 돼서 내려가면 형님은 홀로 방에서 계실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함께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안쓰러워 나는 일이 끝나고 시간이 나면 형님 곁으로 쪼로록 달려가서 별의별 수다를 떨어 댔다.


다른 형님들은 그러셨다. 4째 형님이 시숙님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고, 자궁을 들어내서 기분을 느낄 수 가 없는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지만 여자의 도리를 하지 않으니 남자가 바람을 펴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뒤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왜 그리 화가 나던지. 제일 큰 형님의 간사한 언행들이 화가 날 때가 많아서 참지 못하고 쏘아 대기도 했던 나다. 사람은 때에 따라서 싫어도 좋은 척을 해야 하는데 난 그런 것을 못한다. 큰형님은 내 친정엄마와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는다. 한참 어린 것이 입바른 말을 해대니 형님 역시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4째 형님과의 마지막 만남인 줄 모르고 만났던 때, 형님은 뜻밖에도 시숙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셨다. 여자가 있는 것 같다고... 밤만 되면 시어머님 방으로 가고 자신의 옆으로 오지 않는다고...


그 말에 나는 형님이 정말 많이 좋아 지신 것 같다고 좋아 했었다. 속상한 얘기를 가슴에 담지 말고 털어 놓으라고 말씀드렸다.


 

“동서, 고마워. 매일 다혜 옷과 내 속옷을 챙겨줘서... 난 늘 동서에게 고맙게 생각했어.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형님은 곁에서 수다 떠는 내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형님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