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결혼하여 독일에 왔을때 시어머니께서 내 편의를 위해 나 대신 장만한 살림살이들을 보고 좀 놀랐었다. 그중에서도 놀라운
건 수없이 많은 종류의 칼이었다. 보통 식사용 칼로서 버터바르는 칼, 스테이크 칼, 생선용 칼 그리고 주방용으로 치즈써는 칼,
빵자르는 칼, 야채썰때 쓰는 뭉툭한 칼, 크기가 다른 2가지 종류의 식칼, 과일용 칼, 양파나 마늘껍질 벗길때 쓰는 칼.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국의 내 자취방엔 모든 종류의 야채나 과일을 썰거나 까거나 다질 수 있었던 어중간한 크기의 칼이 단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칼 뿐만 아니라 숫가락, 포크, 국자, 접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중 가장 우스운 용도로 쓰이는 접시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그 접시의 외형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름 10cm가량, 원의 중심 지름 3cm가량이 u자 모양으로 오목하게 들어갔고 그 오목한 원형의 둘레 역시 u자 모양으로
오목한, 흰색 바탕에 꽃무늬 접시. 간추려 말하자면 안쪽과 바깥쪽 둘레만 놔두고 파먹은 도너츠형 접시라고나 할까. 이것의 용도는
다름아닌 \'계란 파먹기\'용이다. 삶은 계란을 중심 오목한 부분에 넣어 세우고 꼭대기에서 1cm정도 살짝 잘라낸 다음 계란껍질을
까지 않고 스푼으로 곱게 파먹는, 혹은 떠먹는 용도인 것이다.
삶은 계란 하면 한번에 탁 때려 까서 두입에 먹어치웠던 나로서는 요런 나릇나긋한 삶은 계란용 꽃접시가 우습기만 하다. 게다가
아침마다 삶은 계란을 요 나긋나긋한 꽃접시에 놓고 소꿉살이같은 스푼으로 나긋나긋하게 계란을 떠먹는, 솥뚜껑같은 손가락을 가진
우리 85킬로짜리 남편을 보면 더 우습다.
앞에서 운동화 이야기도 했지만 \'모든 도구는 용도에 맞게\'쓰는 것이 독일인의 생활신조이다. 드라이버가 없어 칼로 나사를 돌리는
나, 창문닦기용 세제가 없어 물에푼 주방용 세제로 창문을 닦는 나, 식탁보용 천으로 커텐을 만들어 붙인 나, 흰 운동회 운동화를
신고 조깅하는나. 이런 내 모습이 남편의 눈에 좀 이상하게 보인다면 나 역시 그가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문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필요치 않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그걸 \'생활필수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명\'이라고.
깊이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