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주방 창에 걸린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잠잠했다. 나는 물에 씻은 김치에 밥을 싸 먹고 있었다.
작년에 내가 담근 김장을 맛보고 남편은 \'심하게 짜다\'고 했다. 그냥 짠 것도 아니고 심하게! 김치가 짜다는 것이-그것도 20포기나 되는 김치가-이리 대책 없는 일인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다행히 시어머님이 김치를 부쳐 주신 덕분에 겨울은 무사히 날 수 있었지만, 내 김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 버렸다.
그 와중에 봄은 오고야 말았고, 내 마음은 급해졌다. 냉장고 한 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 내 김치를 이제 어떻게든 처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찌개, 부침, 볶음밥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한 번 버림받은 내 김치는 어떻게 변신을 시켜도 맛이 안 났다.
할 수 없이 물에 빨아서라도 먹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날이 처음 실행한 날이었다. 김치 한 포기를 흐르는 물에 씻은 다음, 허연 몸통이 드러난 그것을 머리만 잘라 상에 놓았다. 거기에 찬밥 한 공기와 쌈장만 추가했다. 참으로 소박한 밥상이었다. 나는 얼른 김치에 밥을 싸서 입에 밀어 넣었다. 쌈이 커서 볼이 미어터지려고 했다. 우적우적 씹는데 물기가 줄줄 입 밖으로 새 나왔다. 그걸 손등으로 대충 훔치면서 나는 부지런히 쌈을 쌌다. 그리고는 입 안의 걸 삼키기가 무섭게 새로 집어넣었다. 한참을 그렇게 먹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다 문득 주위가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밥 먹을 때면 으레 켜 두었던 텔레비전조차 그날은 꺼져 있었다. 햇살의 보드라운 움직임 말고는 모든 게 정지돼 있었다. 그 고요한 분위기에 게걸스럽게 김치쌈을 먹는 여자라니,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가 않았다.
슬쩍 부끄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고 쌈을 싸서 입에 넣는 동작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은 마치 맛이나 식사예절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는 기계 같았다. 밥 한 공기가 금세 바닥났다. 김치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일어나서 밥을 더 펐다. 그리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한데 아까처럼 쑥쑥 입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내 배는 이미 충분히 채워졌는데, 그걸 무시하고 밥을 펐기 때문이었다. 김치가 아깝다고 위장을 학대하다니! 짜증이 확 밀려 왔다.
그 짜증은 곧, 나란 인간이 별 수 없지 뭐, 하는 자학으로 이어지더니 느닷없이 울고 싶어졌다. 그런 충동을 느끼자 정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밥을 삼킨 목이 따끔거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더 힘껏 밥을 씹었다. 하지만 홍수처럼 밀려 온 감정들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 뜻밖의 고요함, 맛없는 김치쌈, 미련스런 내 모습, 이런 것들에 자극을 받은 것 치고는 그 강도가 너무나 셌다.
김치쌈은 내가 어릴 때 질리도록 먹던 음식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엄마는 시어질 대로 시어진 김장김치를 씻어 며칠씩 맑은 물에 담가 두곤 했다. 엄마는 그 김치를 나랑 단둘이 먹는 점심상에만 한 포기씩 건져서 올렸다. 엄마의 김치는 시어도 맛이 있어서 쌈 싸 먹는 건 좋았지만, 못 먹는 음식은 당연히 여자들 차지라는 건 좀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난 어른이 되면 음식 갖고 남녀차별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30년 후의 나는 어떤가? 엄마 김치에는 대지도 못 할 만큼 맛없는 김치를, 같이 먹을 딸도 없이 혼자서 먹고 있다! 불현듯 밀려 온 그런 자각은 나를 외롭게 했다. 외롭다고 느끼자마자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도 지금 나처럼, 아니 나보다 몇 배는 더 외로울 것이었다. 그런 남편에 대한 연민이 김치의 차가운 촉감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지난 2월말, 겨울 동안 쉬고 있던 일이 드디어 풀리자 남편은 모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공사현장이 멀어서 주말에만 집에 올 수 있다는 조건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우리 가족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주말마다 우리는 떠들썩한 재회를 했다. 행복이, 사람 사는 맛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3주 만에 꺾였다. 예상보다 일이 길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지난 주말에 집에 온 남편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힘들 때마다 저놈들 얼굴을 떠올렸어.’ 한바탕 두 아이와 놀아준 후 남편은 조용히 말했다.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비우며 남편은 속내를 드러냈다. 마음 안 맞는 사람과 일하는 것도, 일 마친 후 휑한 여관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다 힘들다고 했다. 일이 고된 건 알고 있었지만, 남편이 쓸쓸함을 호소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좀 놀라웠다.
실은 나도 그랬다. 남편이 겨울 내내 집에 있을 때는 지겹기만 했는데, 막상 옆에 없으니 허전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애도, 늘 제 형과 함께 다니다 혼자가 돼 풀이 죽은 작은애도, 혼자서 감당하려니 왠지 버거웠다. 몸이 힘들다는 게 아니다. 크고 작은 일상을 혼자 처리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 같은 게 견디기 힘들었다.
일요일 하루를 쉰 다음 남편은 그날 새벽 다시 일터로 떠났다. 겨우 월요일이었을 뿐인데, 남편을 배웅하는 내 마음은 벌써 한 주를 다 살아버린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남편을 보냈다. 영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때려치우고 돌아오라는 말도, 좀 힘들어도 아이들 생각해서 참으라는 말도, 그 어느 쪽 말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대안이 없는 위로라는 것은 어찌 보면 무책임한 거니까.
나는 매사를 냉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어떤 큰일이 닥쳐도 절대 호들갑 떨지 않았다. 말없이 끌어안았다. 그날 김치쌈을 먹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김치가 짜다고 버릴 수는 없으니까 묵묵히 먹었을 뿐이다. 남편이 힘들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듯이.
엄마는 평생 안 먹고 안 입고 일만 했지만, 결국 단칸셋방에서 돌아가셨다. 한 번 씌워진 가난의 굴레는 어지간해선 벗어나기 힘들다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곧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뜻한다. 남편과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도달할 수 있는 선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새삼 인정하자니 말할 수 없이 허탈했다.
그날 이후 마음을 잡기까지 며칠이나 걸렸다. 김치쌈 같은 사소한 일로 그리 심하게 흔들린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처한 현실에 당당하다고 믿었는데, 그게 실은 내 처지를 가리기 위한 위장술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경지는 평생 단련해야 할 과제 같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나는 앞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거다. 아이들이 커 가고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살이는 훨씬 더 팍팍해질 텐데, 그때 믿을 거라곤 자기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