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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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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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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부부


BY 선물 2006-03-21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편을 본다.

언제 보아도 옆모습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대었다.

그러자 남편은 하던 일에 방해를 받았다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럼, 그렇지. 자기가 무슨 분위기를 파악이나 하겠어. 기껏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인상이나 쓰고...\"

투덜거리는 내게 남편은 변명하듯 한마디 한다.

\"먼저 분위기 파악 못한게 누군데... 한참 열중하고 있는데 방해했으면서...\"

그러나 싫지 않은 표정이다.

\"대신 뽀뽀해줘.\"

남편에게 다가앉으며 썰렁하게 유혹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은 뽀뽀를 해준다.

이런 즉각적 반응은 사실 좀 그렇다.

귀찮아서 빨리 해치우려는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전은 찾았다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물러났다.

 

결혼한지 17년째.

그렇게 젊어보이던 남편의 얼굴에도 굵은 주름이 자리잡으려 하고 그 까맣던 머리도 이젠 흰머리가 제법 눈에 띈다.

이런 남자를 역시 마흔을 훌쩍 넘은 아줌마가 지금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

더구나 부부라는 진부한 이름을 가진 관계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십대 겪었던 열정처럼 달아오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하여 세월의 힘에 의한 정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도 애틋한 내 감정은 분명 사랑이다.  무덤덤하게 살아가던 결혼17년차 아내가 사랑 타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정월 초하루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다투었다.

그동안 내 가슴을 묵직하게 만들었던  매듭 같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섣불리 그것을 끄집어 낸 탓이다.

그것은 결혼초부터 우리 부부의 관계를 매끈하게 이어주는데 몹시 방해가 된 매듭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풀려고 하진 않았다.

쉽게 풀리지 않을 매듭이었기에 그냥 그대로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늘 개운치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억지로 풀려다가 더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릴까 염려되어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왜 그것을 들추어 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동안 쌓여온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것이리라 짐작된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은 단지 순리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17년을 숨죽여 살아왔다는 것은 오히려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점이 아주 안 좋았다.

여러가지로 남편은 몹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고개 숙이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남편을 내가 떠밀어 주저앉힌 격이었다. 나를 원망하는 남편의 눈빛을 난 보았다.

그 일로 우리는 심각하게 이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정을 내린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켰고 어른들께도 다 말씀드렸다.

그동안 우리 엄마 아빠처럼 잘 지내는 집이 없다며 좋아했던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생각보단 그 사실을 심각하게 여기질 않았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란 믿음을 너무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생각해야 했다. 이성적이 되고자 노력을 했다.

하지만, 갈등이 영원히 봉합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자꾸만 결론을 내고싶은 유혹이 강하게 일어났다.

 

서로 각방을 쓰며 일주일을 보냈다.

나는 내 할 일만 하고 방에 틀어박힌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알고 계신 어머님은 아들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미움은 내게로 향했다.

여자가 참아야 되는데.... 라는 신앙 같은 사고방식으로 나를 밀어붙이셨다.

그러나 내 마음은 놀랍도록 차가워졌다.

싸늘하게 식은 마음은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남편과 이혼하는 것이 더 나은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백가지를 넘진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열손가락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이혼을 하고 나면 어떤 것이 좋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 또한 백가지는 못 넘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열가진 훨씬 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혼 후를 상상해 보았다.

어떻게 살아가리라 나름대로 계획도 세워보았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온전히 내 문제를 갖고 치열하게 생각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한번 제대로 살아보리란 의지도 불타 올랐다.

아이들에게 가장 최선일 수 있는 삶을 살리라 결심을 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지금보단 낫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동안 남편의 상황은 최악이 되어갔다.

정초부터 시끄러웠던 탓일까, 자꾸 어려운 일들이 닥쳐왔다. 남편의 모습은 초췌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은 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사연을 다 밝힐 순 없지만 어쨌든 나를 그토록 힘들게 한 사람을 이해하려고 어느 새 그 사람 입장에 서있는 한심한 나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때때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속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나를 속이고 내게 속았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남편으로부터 돌아서선 안되겠지.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닐 거야.

이 사람도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겠지.

노력만으로 마음이 움직여지진 않을 수도 있을 거야.

아이들 생각해서도 내가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물론 이혼은 남편이 결정한 것이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면 절대적으로 나의 양보가 필요한데 내가 그것을 쉽게 견딜 수가 있을까.

 

열흘이 다 되어 내가 먼저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남편의 99는 밉고 남편의 1은 사랑한다.

그런데 1의 힘은 99를 이기고도 남을 만큼 컸다.

이혼을 꿈꾼 내가 진실인지 그러면서도 헤어지지 못할 갖가지 이유를 찾던 내가 진실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둘 다 진실이기도 하고 사기이기도 한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억지 봉합 수술로 일단의 위기는 넘겼다.

사실 쉽게 썼지만 매우 어렵고 아픈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남편이 곁에 있기만 해도 손을 잡고 얼굴도 갖다 대면서 남편의 체온을 느낀다.

정말 이사람이 귀하고 사랑스럽다. 아주 잘난 시절의 남편이 아닌 작고 작아진 지금의 남편이 이렇게 눈물겹게 귀할 수가 없다. 여전히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남편의 존재는 애틋해진다.

그러면서도 과연 우리가 인생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남편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남편을 미워하는 일은 절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인 내 사랑의 감정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그를 그렇게 사랑하도록 만든 것은 그의 힘이 아닐까. 그 힘도 사랑이 아닐까.

이 나이에 이런 사랑을 느끼며 산다는 것은 그래도 감사한 일이리라.

여전히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면서 때때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함께 하고싶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