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중순, 큰애 초등학교 예비소집이 있었다.
아이 손을 꼭 잡고 얼어붙은 눈길을 조심조심 밟으며 학교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예비소집은 싱겁게 끝났다. 별다른 행사 없이 각자 이름만 확인하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굳이 아이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는데, 예비소집 안내장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조금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한테 미리 학교를 구경시킨 셈 치기로 했다. 하지만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종이 한 장을 받으면서 내 기분은 더할 수 없이 나빠졌다. 제목부터 권위주의 냄새가 확 끼치는데다 세부 항목을 훑으려니 거부감이 울컥 치밀어 종이를 구겨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묘하게 사람을 지배하는 ‘학교’라는 조직의 그 퀴퀴한 냄새는 여전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예전에는 집에 텔레비전이며 냉장고가 있는지, 내 집인지 셋방인지까지 다 따졌다. 그 항목이 사라진 건 반갑지만, 요즘 웬만한 가전제품 없는 집은 없을 테니 조사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하는 것이지, 의식이 달라진 때문은 아니다 싶었다. 새로운 게 있다면 아이의 예방접종 여부를 묻는 것 정도일 뿐 가족관계를 따지고 드는 거며, 부모의 직업, 종교, 학력까지 세세히 알려고 드는 것도 변함없었다. 내 마음은 바싹 마른 화초처럼 금세 우울해졌다.
집에 돌아와 신발도 벗기 전에 나는 그 종이부터 신발장 서랍에 처박아버렸다. 그 후 쭉 모른 체했다. 하지만 머리 한 구석에선 그 생각이 줄곧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입학식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그 종이의 빈 칸을 메우는 일을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직업과 학력 란이다. 직업은 뭉뚱그려서 대충 쓴다지만 학력은 선이 분명하다.
나는 학력에 대해 몇 가지 대안을 세워봤다. 첫째, 대졸이라고 쓴다. 둘째, 학력 란만 비운다. 셋째, 담임이나 교장한테 이걸 왜 써야 하는지 물어본다. 넷째, 그냥 사실대로 쓴다. 첫 번째가 가장 무난하지만 내 양심과 자존심을 팔아야 하니까 제외한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시도해 볼 만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별 수 없이 네 번째로 기울 것이다.
이런 고민을 나는 남편도 모르게 혼자 하고 있다. 쓸데없는 일에 목숨 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결코 사소한 문제는 아니다. 학기 초면 으레 치르는 절차려니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등록금처럼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일 일까지는 아닌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데 왜 부모의 직업이며 학력을 알아야 하는가?
직업이나 학력은 누구한테나 민감한 부분이다. 우월감이 됐든 열등감이 됐든 자신의 학벌에 대해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엄마는 국졸이었다. 국졸이니 대졸이니 뜻도 잘 몰랐던 그 어린 눈에도 본능적으로 국졸이 제일 처지는 걸 알고 풀이 죽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감정을 안 느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주민등록 지문날인도 원한다면 거부할 수 있는 세상인데, 당신도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안 쓰면 될 것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이런 구태의연한 조사 자체를 없앴으면 하는 것이다. 아니면 아이와 직접 관련된 것을 물었으면 좋겠다. 부모의 직업이나 학력보다는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깔을 아는 게, 담임이 아이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마 그들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학교가 수많은 아이를 한꺼번에 맡으려면 그 아이의 가정환경에 대한 기초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환경을 알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난 모르겠다. 내 눈에는 아이 하나하나의 기초자료를 검토하는 담임의 모습이 보인다. 그 내용에 따라 담임의 머릿속에는 아이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부모가 고학력이면 ‘흠, 이 집은 아이 공부에 욕심이 많겠군.’ 부모의 학력이 낮으면 ‘흠, 이 집은 아이보다도 먹고사느라 정신없겠군.’ 하기가 쉽지, ‘아, 이 집은 부모 수준이 높아 잘 알아서 할 테니, 난 무관심해 보이는 집 아이를 더 챙겨야겠군.’ 하고 마음먹을 교사가 있을까? 그렇게 선입견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담임은 아이의 얼굴과 특성을 익히기도 전에 이미 그 아이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할 것이다. 너무 내 주관에 치우쳐서 조사의 역기능만을 강조한 셈이 되었지만, 굳이 순기능이래야 개성 있는 아이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획일적으로 통제하려는 용도 말고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상을 졸업했지만 씩씩했다. 학벌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정한 성공은 충실한 알맹이에 있다는 식의 일반론을 믿었다. 그래서 문학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부럽기는 했어도 나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그런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십대 초반 무렵 모 백화점 사보에 내 콩트가 뽑힌 적이 있다. 담당자는 축하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내 신상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성실히 대답했다. 한데 사보를 받아 보니 내 약력 소개에서 최종학력이 빠져 있었다. 그제야 어디 국문과 출신이냐고 거침없이 묻던 그 담당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아마도 국문과를 나와야 그런 콩트를 쓸 수 있다고 믿었나 보았다. 그의 상식이 어떻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학력을 고의로 누락시킨 건 명백하게 나를 우롱하는 처사였다. 사보의 위신 때문이었는지 나를 배려한답시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한 방에, 학벌은 간판에 불과하다는 구호가 헛것임을 알아 버렸다. 세상은 겉과 속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지금 대학 안 나왔다고 기죽지 말고 더 당당해지자는 식의 상투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학력을 요구하는 온갖 제도에 일일이 대항하려는 것도 아니다. 살아가면서 학력을 밝힐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인터넷 회원가입만 하나 하려고 해도 빠지지 않는 것이 학력이다. 그럴 때마다 방방 뛰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나는 아이 입학과 관련해서는 흥분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능성이 무한한 아이한테 자칫 \'얘는 이러이러한 환경의 아이\'라는 꼬리표부터 다는 건 아닌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내 능력이 딸려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뒷바라지를 못할 수도 있는 앞날을 미리 들켜버린 것과도 같은 두려움이다. 지금은 그냥, 처음으로 학부형이 된다는 기쁨에만 젖어있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나? 왜 이런 종이쪽 하나로 입학도 하기 전에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나는 백 번을 양보해도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것이 권위주의의 찌꺼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 이 글 쓰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난 그 불편함의 정체가 혹시 내 소심함에 대한 짜증은 아닌지, 열등감으로 꼬인 탓은 아닌지 많이 불안했다. 하지만 글을 맺는 지금 분명하게 깨닫는다. 이건 그냥 분노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옷을 벗기려는 뻔뻔한 사회에 대한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