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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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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BY hayoon1021 2005-12-29

 

얼마 전 봤던 한 TV 프로그램은 충격이 컸다.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그 내용은, 마치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건 알았지만 암세포로 구멍이 뻥뻥 뚫린 폐를 직접 보고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신분상승의 정직한 통로였던 교육마저도 이제는 돈을 얼마나 쏟아 붓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세상이니, 없는 집 아이들은 시작부터 불리하단다. 이런 악순환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커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 사회가, 철저한 상하체제였던 조선시대와 뭐가 다르겠냐며 진행자는 침통하게 끝을 맺었다.

나는 얼른 자고 있는 두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 천진한 얼굴에 재가 뿌려진 듯 기분이 나빴다. 아이들한테 해줄 수 있는 내 능력의 한계를 미리 다 봐버린 것처럼 맥이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사실이다. 내가 우리 부모의 생활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못한 것처럼, 내 아이들도 특출한 재능이 있지 않고는 그 선을 넘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게 순순히 인정했으면 속이 좀 편해야 할 텐데, 갈수록 마음은 더 답답하고 무거워졌다.

나는 쓸쓸히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부자 부모가 될 수 없다면 소신 있는 부모라도 되리라. 강한 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약한 자에게 거만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리라. 허리띠를 졸라 매야만 하는 이 생활을 미안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가난할망정 부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를 자주 일깨워 주리라.

20여 년 전, 열일곱의 나는 극심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가난은 우리 집 곳곳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갈수록 심했고, 새엄마와의 갈등도 컸으며, 학교는 휴학하고 봉제 공장에 다니던 때였다. 세상에 나만큼 불행한 아이는 없다고 밤마다 일기를 써내려갔다. 한데 이런 나를 부러워하는 애들이 있었다. 공장에서 만난 영주와 미연이었다.

미연은 나와 동갑이고 영주는 세 살 어렸다. 우리는 열일곱이라도 됐고 키나 덩치도 있어서 보기가 덜 서글펐지만, 열네 살인 영주는 항상 안쓰러웠다. 언니 아줌마들이 가득한 공장에서 또래였던 우리는 쉽게 뭉쳤다. 일마치고 어디 놀러가거나 하는 일은 꿈도 못 꿨지만, 점심시간 30분 동안 도시락 까먹으며 수다만 떨어도 너무 재미있었다.

날씬하고 예쁜 미연은 고아였다. 가정부로 들어갔던 집의 아들이 귀찮게 해서 집을 나온 후 쭉 혼자 산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미연은 나이에 비해 성숙했고 어딘지 비밀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한 번은 미연이 달셋방에 놀러간 적이 있다. 비키니 옷장에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전부인 그 작은 방은 왠지 휑했다. 책상 위에는 탈무드며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그날 미연은 자기 얘기를 많이 했고, 적금 타면 다시 복학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학교 친구가 아닌 미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을 좀 했다. 내가 워낙 낯을 가리기도 했지만, 가소롭게도 미연이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영주 역시 부모는 없었지만 4남매 중 셋째여서 미연이보다는 좀 처지가 나았다. 영주는 하얀 얼굴에 눈이 예쁜 아이였다. 사장 눈치 보며 중학과정의 야학에도 열심히 다녔다. 야학 입학식 때는 우리도 가서 축하해 줬다. 거기서 영주의 언니와 그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때 그들은 겨우 스무 살 정도였는데, 얼굴빛이 너무 어두웠다. 줄줄이 어린 동생을 거느린 언니로선 연애를 하면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 젊은 커플의 삶에 찌든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면 멋진 인생이 기다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친 그들을 보면서 막상 그 순간이 와도 내 인생이 별로 달라질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너무 일찍 찾아온 체념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뿐이라는 해답도 빨리 얻은 셈이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영주와 미연이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 뒤 한두 번쯤 만나다가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영주가  찾아왔다. 우리는 마루에 드러누워 나른한 여름 오후를 보냈다. 집에 돌아갈 때가 다 되어서야 영주는 사장한테 성폭행 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영주는 키도 작고 몸집도 아직 어렸다. 그런 애한테 손을 대다니!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일은 한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고, 더 놀라운 것은 영주가 그 사장한테 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미웠지만 자기한테 그렇게 잘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 차츰 좋아졌다는 거다. 그는 30대의 유부남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오죽 힘들고 외로웠으면 그런 사람한테라도 의지하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영주한테 당장 그 관계를 끝내라는 말밖에 해줄 게 없었다. 그 뒤 영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는 일이 여전히 힘겨운 지금, 나는 가끔씩 영주와 미연을 생각한다. 그들도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재 모습만은 멋지게 변해 있기를 바란다. 일이 잘 풀려서 공부도 계속 하고, 좋은 남자도 만나고, 자신의 꿈도 다 이룬, 그런 행복한 사모님이 되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가난이나 불행이 대물림된다는 말 따위는 한 방에 날려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