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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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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닦으며...


BY 개망초꽃 2005-12-02

냉장고엔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가 밀폐용기속에서 잘 썩고 있었다. 어쩌다가 날짜를 놓쳐버린 과일도 수분이 빠져 주름 투성이었다. 몇 달이나 된 한약은 처음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는 듯이 야채 박스 통에서 주인아줌마 손에 닿기만을 기다리며 잘 누워있었다.


상해버린 반찬을 버리려고 하다가 이왕 시작한 일, 냉장고를 분해해서 닦기 시작했다.

반찬 자국들을 행주로 닦고 살다가 오늘은 마음먹고 대청소를 했다. 냉장고는 처음 내 집을 장만하던, 13년 전 일산신도시로 입주를 할 때 새로 산 것이다. 그러니까 냉장고는 시한부 인생인 턱이다. 가전제품의 수명은 십년이라니까 언제 심장이 멎을지 모르는 장수 측에 속하는 노인이다.


냉장고는 요실금 환자다. 자꾸 물이 밑으로 샌다. 그래서 밑구멍에 걸레를 차고 있다. 심하지 않은 편이어서 걸레로도 감당이 되고 있는 상태다. 심장에 구멍이 났는지, 허파가 막혔는지 소리가 좀 크다. 손님이 오시면 냉장고를 가리키며 시끄럽다고 이제는 바꾸라고 한다. 우리 식구들은 익숙해져서 그런지 별로 모르고 지내는데, 하긴 기찻길 옆에서도 아기들이 크고, 비행기 길 밑에서도 공부들도 잘 하는데, 냉장고 소음 정도야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보다 작은편이다.


냉장고를 분해해가며 닦는데 일이 생각보다 크다. 널찍한 밑받침을 싱크대에서 닦으려니 물이 다 튄다. 야채박스가 개수대보다 크다. 물이 튕겨져 옷이 젖었다. 부엌바닥이 물 바닥이다. 나는 냉장고나 싱크대 청소를 할 때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다. 고무장갑을 끼면 구석구석 손가락 닿을 부분이 불편하다. 맨손으로 닦아야 일이 빠르고, 구석진 곳까지 섬세하게 닦을 수 있다.


비록 구닥이지만 십 년 전엔 최신형 냉장고였다. 은회색 빛이 눈이 부실정도였다. 부엌에 냉장고를 세워 놓고 바라보는 그 멋스러움은 주부입장에선 은회색 자가용만큼 뿌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 구닥다리다. 멋스러움은 젊었을 때 얘기다. 우리도 그러지 않았는가. 내가 젊었을 때는 피부가 윤이 났었지, 잡티는 찾아보질 못했어. 몸매는 반지르했지, 모델 하라는 말도 들었어. 아...눈빛은 얼마나 맑았는지 남자들이 내 눈에 반했다잖니, 내 입술에 키스를 한번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얼뜨기도 있었다고, 내가 젊었을 때는 미스롯데에 나가보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잖아. 냉장고도 그랬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그 젊음에 부엌이 아름다웠다. 야채를 넣으면 더 싱싱해졌고, 과일을 꺼내 먹으면 아작하니 상큼했다. 반찬 통을 칸속에 차곡하게 넣어두면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움이 넘쳤다. 그러나 세월의 뒤안길에선 사람이나 기계나 감정이나 탈색이 되고 심드렁해지고 삐거덕거리게 마련이다. 도무지 치워도 표시가 안나고, 과일을 채워 넣어도 싱그럽지 않을뿐더러 이제는 야채실의 야채가 거무죽죽하게 얼어버린다. 그래서 야채실엔 야채를 넣지 않고 한약이나 얼어도 무방한 것들을 넣어둔다. 야채를 맨 위로 올리다보니 정리 정돈이 잘 되지 않고, 어수산란해서 냉장고는 들여다보기 민망한 보관창고에 불과하다.


요즘 나오는 냉장고는 양쪽으로 여는 지펠이라는 여왕이다. 난 지펠 광고를 보면 영화에 나오는 젊은 여왕을 연상하게 된다. 모델들도 여왕 같은 우아함을 가졌고, 그 우아한 모델이 냉장고 앞에 서 있으면 냉장고도 같이 우아한 여왕 같다. 어떤 광고는 아주 섹시하다. 빨간 드레스를 입었던가? 아닌가..파란색이었던가...아닌가..짧은 미니를 입었던가...아닌가...헷갈린다. 암튼 그들은 우아하고 섹시하고 귀티가 찰찰 흘러내렸다. 양쪽으로 열리는 냉장고는 크기도 크지만 겉모습이 맘에 쏙든다. 물론 안은 더욱 더 편리하고 깔끔하고 보관하기 좋게 수납이 아기자기 하겠지만 일단은 겉모습에 반해 그들 중에 하나를 사고 싶다.


그러나 그건 남의 이야기고, 나는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이 냉장고가 내겐 꼭 필요한 부엌살림이다. 비록 밑구멍에 물이 고여서 지저분하고, 잊어버려 걸레를 갈아 주지 않으면 물은 걸레를 넘쳐 부엌바닥으로 오줌 싼 것같이 흘러 흘러가지만, 십년을 넘게 나와 살아준 냉장고가 고맙다. 그래서 오늘 깨끗이 씻어줬다. 확실히 여자와 살림은 가꾸기 나름이라더니, 넙데데한 냉장고 문이 반질 반질거린다. 기분이 좋다. 내가 찜질 방을 갔다 온 것 같이 후련하고 시원하고 기분이 날아간다.


냉장고에서 나온 오물이 많다. 음식찌꺼기도 한 봉지고, 쓰레기도 한 봉지다. 냉장고는 겉으로 보이지 않아서 덜 치우게 된다. 나중에 먹어야지 하면서 그대로 반찬을 놔두게 되고, 나중에 버려야지 하고 미루다 보면 음식 신선도 실이 아니고, 음식 쓰레기실이 된다. 두 식구 살림이, 가끔은 딸아이가 오면 세식구가 되지만, 왜 그리 치울게 많은지 ,이삼일 안치우면 집안이 지져분해진다. 냉장고는 대충 치우고 살면 반찬국물이 눌어붙어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수세미로 여러 번 문질러 닦아냈다. 계란 오목 집도 먼지가 잘 낀다. 음료수나 물을 넣어두는 문에 달린 수납공간에도 먼지가 많다. 그걸 다 빼서 닦아내니 구닥 냉장고가 새댁 냉장고 같다. 양쪽으로 여는 우아한 여왕냉장고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몇 년은 더 생명연장이 될 것 같다. 내 욕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