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며느리 모인 자리에서 한 가방 가득 든 혈압약과 관절약을 꺼내 보여주신다.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시고 동사무소 헬쓰클럽도 다니시고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도토리를 주워 오시는 시엄니. 본인은 여기 저기 아프다 호소하시지만 난 곧이 듣지 않는다. 왠지 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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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 잊어 버리셨을까?" 틀니를 하신 시엄니를 바라보며 혼자 생각한다. "이가 없으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데 그래서일까?"
지난 추석 내 눈을 쳐다보며 반가이 맞아 주시던 시엄니. 작년엔 나랑 눈을 마주치지 않으셔서 정말 황당했었다. 사업을 접고 비칠대는 걸음으로 찾았던 시댁에서 난 정말 돌아온 탕아였다. 아무도 아는체 않는.
작년 여름 뜻하지 않았던 사업상 불운을 겪으면서 난 세상 두려운 줄 알게 되었고 내 한계를 그을 수 있게 되었고 누가 내 편인지 또 내 편이 아닌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가장 배신감을 느꼈던 이는 시엄니였다. 그만큼 믿었었단 뜻일까?
보험회사보다 믿음직한 맏아들에 어울릴 만한 착한 맏며느리 노릇을 나름으로 충실히 했다고 혼자 자신했고 시엄니도 고맙다는 말씀을 입버릇같이 하셨기에(속으론 당연하게 여기셨나봐) 내가 힘들 때는 시엄니가 응당 도와 주시겠지 굳게 믿었었다.
남은 몰라도 자기식구에 대한 애착이 유난하시고 자식 욕심이 많으셨기에 맏아들을 젤로 사랑하신다기에 맏며느리도 사랑하시리라 이뿐 손주들을 모른 척 못하시리라 여겼었다. 적어도 그런 제스츄어쯤은 하셨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시엄니에게 속았다.
남들에겐 몰라도 당신 자식에게만큼은 끔찍하셨기에 며느리인 나조차도 딸쯤 되는 대접을 바랬는지 모른다. 터무니없게도.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아들은 자신의 피붙이지만 며느리는 남의 집 딸일 뿐인 것을.
이왕이면 크게 벌이라는 책임 못질 말씀까지 하시며 거들던 시엄니는 사업 시작후 조금만이라도 더 도와 줬으면 하던 바램을 묵살하시고 약속이라도 있는듯 바삐 시골로 내려가셨다. 갑자기 찬 바람이 쌩 불었다.
결국 급작스레 몸이 안좋아져 아들이 며느리 다죽게 생겼다고 SOS를 친후에야 마지못해 부랴부랴 올라 오셨다. 날 보시고 "많이 아프다 해서 죽이라도 끓여먹나 했더니 괜찮구나." 그러셨다.
계실 동안 날 대신해 밥도 해주시고 손주들도 알뜰히 돌봐 주셨다. 하지만 내가 건강하고 잘 나갈 때는 하나도 문제되지 않던 일들이 아프니까 시엄니에게는 다 문제가 되었고 내 탓으로 돌아왔고 심각해졌다.
한없이 약해져서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동생의 이혼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비수가 되어 다시 내게 날아들 때에는 쏟았던 눈물을 죄다 주워 담고 싶었다. 당차고 고마운 며느리에서 우습고도 미운 개털로 전락하는 일이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알았다. 뼈저리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실패도 좌절도 이해받고 품안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었다. 이 역시 무지몽매한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족이란 행복도 불행도 함께 하는 거라 믿었었다. 행복할 때는 가족이 되었다가 불행할 때는 가족이 아니 될 수도 있다는걸 알았다. 잘 나갈 때는 아들 잘 낳은 덕이고 못 나갈 때는 오로지 잘못 들어온 며느리 탓이라는 걸 알았다.(잘되면 지 탓 못되면 여자 탓)
귀한 아들 힘들게 하는 며느리가 얼마나 미웠을까?
나빴던 상황을 오로지 내 힘으로 일년만에 다시 반전시킬 수 있었으므로 나 자신과 신께 감사한다.
내 눈을 안 쳐다보려던 시엄니가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네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다시는 아프지 말아야 겠으며 실패하지도 말아야 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한다. (굴욕을 또다시 겪지 않아야 하겠기에. 너무 힘들었기에.)
다시 느이 집에 안 오겠다고 아들에게 선언하시며 내려갔던 시엄니가 같이 살자고 애원할 때까지 질투날 만큼 잘 살자. (그런 일은 없는 편이 낫겠지.ㅎㅎ)
다시는 진흙탕에서 같이 뒹굴지 않을 것이며 고요하고 맑은 호수를 떠다니는 백조같이 우아하리라.
남편이 도와줘야 겠지만 과부로 살지 않으리라.
홀로 험한 세상에서 자식들과 살아남아야 했던 시엄니의 가르침이었나 보다.
차례를 지내고 친정으로 떠나기 전 제수비를 드렸다. 시엄니-"그렇게 많이 사오고 돈까지 주나?"(왜 이제 주냐? 안 주는 줄 알았잖아.) 나 -"엄니, 제수 사시느라 돈 많이 드셨지요? ㅎㅎ" 시엄니-(그래, 이걸론 택도 없다.) 아들-(약속이나 받으려는 듯이)"저희 힘들때 도와 주셔야 해요?" 시엄니-"그러엄. 힘들면 도와 줘야지."(아프지 마라~잉. 나한테 주욱는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PS; 쓰다가 보니 시엄니 눈에는 남편도 있는 제가 배부른 투정을 한다 싶으셨을 거 란 생각도 드네요. 옛날 순진했던 며느리가 더이상 아닌데 다시 착한 며느리 놀이 하려니 울화가 치미 네여. 지치지 않을 만큼만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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